처음 제주도 가족여행을 갔을 때
제주시와 서귀포를 잇는 5.16도로나 성판악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몇 번 통과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처음 그 길을 운전하고 갈 때 순간 난감한 경우가 있었는데
종종 양 갈래길이 나오는 것이었다.
아무런 설명이나 이정표가 없는 상태에서의 길의 선택은 초행길의 운전자에게는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몇 분, 아니 몇 초도 안되어 문제는 쉽게 해결되었는데
아무렇게나 골라잡은 불안한 선택의 길이 결국에는 금세 합쳐지는 구조였던 것이다.
그 길이나 이 길이나 그게 그거였다.
"모든 진리를 가지고 나에게 오지 말라
내가 목말라한다고 바다를 가져오지는 말라
내가 빛을 찾는다고 하늘을 가져오지는 말라
다만 하나의 암시, 이슬 몇 방울, 파편 하나를 보여달라
호수에서 나온 새가 물방울을 몇 개 묻혀 나르듯
바람이 소금 알갱이 하나를 실어 나르듯"
.. ..<모든 진리를 가지고 나에게 오지 말라> 울라브 하우게
첫눈이 올 것 같은 12월의 첫 월요일이고
명퇴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아침이다.
'명퇴'라는 단어는
'이것이고 저것이고 다 때려치우고 싶다'라는 말의 동의어이다.
존엄이나 품격까지는 아닐지라도
상황이나 타인이나 나 스스로가 주는 쓸쓸함이 임계점을 남실거리는 요즘이다.
새로 산 시집 속의 짧은 시들도 좋지만
겉표지의,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무표정으로 서 있는 할아부지 울라브 하우게의 사진과
그 아래 짧은 글이 시 못지 않게 위로의 부스러기가 된다.
-하우게는 줄 것이 많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는 작은 스푼으로 마치 간호사가 약을 주듯 먹여준다.
그는 옛날 방식으로 죽었다. 어떤 병증도 없었다. 단지 열흘 동안 먹지 않았다.
슬픔과 감사로 가득했던 장례식은 어린 하우게가 세례를 받은 계곡 아래 성당에서 있었다.
말이 끄는 수레가 그의 몸을 싣고 산으로 올라갔다.
작은 망아지가 어미 말과 관을 따라 내내 행복하게 뛰어갔다.
선택한 길이나 불안하여 선택하지 못한 길이나
그 끝은 큰 차이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제주도의 그 길처럼.
다만
나의 마지막도
작은 망아지가 어미 말과 함께 내내 행복하게 뛰어가는 그런 평화의 스러짐이 된다면
하우게가 선택한 옛날 방식의 그것을 선택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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