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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어느 보통의 날에

 

 

친구 진영이가 결혼을 했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얘가 기억력이 나쁜가"했다.

 

지난 토요일에 스몰웨딩에 초대되었다.

나의 축복을 특별히 받고 싶다고,

축시를 써서 낭송해 달라고, 부탁을 해서

새벽 4시까지 끙끙대며 써대다가 입술이 부르트기까지 했다.

새신랑을 보니, 기억력이 나쁜 것이 아니라

, 결혼하고 싶을만치 반할만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보통의 날에>

 

우리, 가장 푸르던 어느 봄날

동아리 소풍에서 처음 본 그녀는

풀 섶의 풋사과를 닮아 있었습니다.

 

세월의 길목을 돌아

우리는 어영부영 엉겁결에 어른이 되었고

다시 만난 그녀에게서는

사과 꽃 마른 향기가 났습니다.

 

어느 보통의 날인, 오늘

여전히 고운 그녀 곁에

검붉은 맨드라미 같은 선한 남자

서 있습니다.

바람 좋고, 양지 바른 곳에

이 두 사람 의자 두어 개 내놓으려합니다.

하나의 풍경이 되려합니다.

 

쓸쓸하고 고단했던 어깨에

또 하나의 어깨를 가만히 빌려주고

일부러 들켜준 흉터를 쓰다듬어

벌레 먹은 잎사귀를 따내어주는,

그런 보통의 날들 되소서.

 

키 발 든 앞꿈치로 조심조심 들어가

곤히 잠든 당신의 창문을 닫아주듯

옷깃의 풀어진 실밥을 뜯어주고

몰래 눈꼽을 훔쳐주는

 

숨겨주고, 눈감아주고, 비스듬히 기대어주는

그런 보통의 날들 되소서.

 

 

배롱나무 흔들리는 꽃잎처럼

잘 웃는 당신 때문에

덩달아 나도, 이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고

덩달아 나도, 순하디 순하게 살고 싶어졌다고..

그런 보통의 날들 되소서.

 

쓰리빠 짝 끌며 한가로이 거니는 초저녁

당신 눈동자에 뜨는 반달 보다가

화들짝 밀려오는 저 소소한 설레임

허접한 삶의 골짜기마다

복병처럼 켜켜이 숨겨 둔 황홀에 몸서리치는

그런 보통의 날들 되소서.

 

젊기에 가장 아름다웠던 날 대신,

늙어가는 서로를 바라볼 수 있어서

같이 나란히 낡아가 줄 수 있어서 아름다운 날,

그런 보통의 날들 되소서.

 

당신이라는 이유로,

당신이라는 이유로,

보통일 수 없는 날들, 보통일 수 없는 날들.

그런 날들 되소서.

 

 

 

- 두 분의 동행을 축복하며, 기뻐하며 진영이 친구, 선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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