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를 만났다.
그 시절,
야간학습을 하다가 정전이 된 틈을 타서
'오 그대여, 한 마디만 해주고 떠나요.
지금까지 나를 정말 사랑했다고, 오 그대여
그 한 마디 잊지말아요. 나는 오직 그대만을 사랑했다고'
휘버스의 <그대로 그렇게>를 어둠 속에서 목청껏 함께 불렀던 시절,
늦가을, 학교에 설치된 박정희대통령의 임시 분향소에 묵념하러 줄지어 가던 시절,
그 때 내 앞 자리에 앉았던 안나를 30년이 넘은 세월 후에 처음 만났다.
자주 생각났었고,
어찌 살고 있을까, 많이 궁금했었고
용이처럼 선한 남자 만나서 새끼 그득 실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잠깐 했었다.
안나는 서당리라는 동네의 구멍가게집 딸이었다.
항상 바빴고, 자주 지각했고, 항상 추워보였다.
부모가 자신의 생부 생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내게 처음 말해주었을 때
아, 그래서 이름이 '안나'인가보다라고 생각했었다.
내게 자신의 한 쪽 가슴이 없어서 시집을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은밀한 고백을 했을 때는
그 결핍과 남자를 만나 사는 일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묻을려다 참았었다.
염치 좋고 넉살 끝내줬지만,
그 만큼의 높이만큼 진실과 현실이라는 땅바닥으로부터 발이 붕 떠있는 듯한
안정되지 못한 성품이 안쓰러운 친구이기도 했다.
맞다.
안나는 참 안쓰러운 친구였다.
꼭 안아주었다.
야이야이 야이야이 말해요.
그대여자 돼달라고 말해요~ 그 시절의 우리처럼 그녀가 여전히 넉살좋게 노래를 불러재낄 때
나도 그녀의 허리를 잡고 목이 아프게 따라했다.
남편이 공무원이란 말도,
딸만 둘이란 말도
내겐 눈물이 나는 감격스러운 이야기로 들렸다.
남녀공학이었던 시골중학교의 동창회
그 소란함과 들뜸, 불콰한 눈빛들을 벗어나서
화장실에 갔다.
새로 저장한 안나의 전화번호가 카톡에 새로 등록되면서
뜬 상태메세지
'나를 예뻐해줄래?'
예뻐해달라는 말을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예뻐해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촛점 맞추지 못하는 눈빛으로
과잉의 몸짓만 풍성했던,
항상 추워보였던 안나가 하는
그 말이 참 좋았다.
정말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