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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봐, 날고 있어.

 

 

#1. 봐, 그는 날고 있어.

 

티벳의 장례 풍습인 조장(葬)을 참관한 친구가 있었다.

건조한 날씨에 일주일 정도 두어 검게 변한 시신의 살점을 칼로 발라

던져주면 새가 채어간다고 했다.

남은 뼈도 잘 빻아서 곡물 가루와 섞어 던져주어 마지막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몇 명만이 참관할 수 있고 무척 고요한 가운데 

육신의 조각을 문 새가 하늘로 날아오르자 

옆에 있던 외국인이 속삭였단다.

"봐, 그는 날고 있어."

죽은 이의 몸이 새를 통해 날아오른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다른 생명으로 이어진다.

-김하나, 《내가 정말 좋아하는 농담》, 110쪽-

 

이런 글을 읽으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다소 옅어진다.

나도 이십 년쯤 후에는 모악산 어디 쯤을 날고 있을 수도

만경강의 억새 숲 사이의 물줄기 속을 유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2. 상쇄

 

몸의 노출의 정도가 크면 시선을 끌게 되고

사생활에 대한 노출이 깊으면 이야깃 거리가 된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투명한 솔직함은 자칫 불필요한 정보의 전시가 되어

가난한 영혼으로 동정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

반면 꽁꽁 싸매고 자신에 대해 전혀 오픈하지 않는 자와는

인간적으로 가까워지기가 쉽지 않다.

노출이 진솔함이 되고 

말 없음이 품격이 되기 위해서는

분별력이라는 줄타기가 필요하다.

눈치와 통밥이 필요하다.

너무 많은 정보를 노출한 날은 마음에서 쇠냄새가 난다.

오늘 좀 그렇다. 통밥을 재는 일에 실패했다.

솔직함이라는 유혹에 말려 줄에서 발을 헛디뎠다.

상쇄가 필요하다.

이번 한 주는 고요하기.

 

 

#3. 채움과 비움

 

기전여고를 다닐 때 담장이 붙어있던 신흥고는 그야말로 두근거림 자체였다.

딱 한 번 신흥고의 교정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전국체전이 우리 도시에서 열렸고 식전행사로 마스게임을 맡았던 우리는

학교 연합으로 하는 전체 총연습을 신흥고 운동장에서 했던 것이다.

그날의 설레임과 흥분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보았던 등굣길에 나래비로 서 있던 은행나무들,

이제는 일주일에 한 번씩 보게 되었다.

새로이 다니는 나의 교회는 '따로 건물을 짓지 않는, 교회 건물이 없는' 교회이고 

신흥학교 강당을 빌려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이 나를 채우고

하나님으로 인해 내 것을 비울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찬이다.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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