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정도였던 것입니다.
사랑에 관해서라면 그 정도의 감정이 적당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고 이윽고 괜찮아지는 정도.
헤어지더라고 배신을 당하더라도 어느 한쪽이 불시에 사라지더라고
이윽고 괜찮아,라고 할 수 있는 정도, 그 정도가 좋습니다.
아기가 생기더라고 아기에게든 모세에게든 사랑의 정도는 그 정도,라고 결심해주었습니다.
애자와 같은 형태의 전심전력, 그것을 나나는 경계하고 있습니다.
...
-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104쪽 -
도청 뒷길로 이어지는 도로변의 단풍이 참 곱다,
라고 생각한 게 엊그제인데 벌써 잎사귀가 거의 다 떨어졌다.
그곳의 4월의 신록은 이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 중의 하나일 것 같다고
감탄한 것 역시 얼마 전인 것 같은데
벌써 11월의 중간이다.
가을, 봄, 가을, 봄 잊지 않고 순환하는 계절이나
보름달, 그믐달, 보름밤, 그믐밤...
섭섭할 때 쯤 다시 둥글게 차 올라주는 달의 뫼비우스 띠가 있어
다행스럽다.
허무와 무의미를 채워주던, 날 선 푸른 욕망들은 이제 시들해져
가자미처럼 삶은 납작한 평면의 모양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무심하면 토라져버리는 속 좁은 애인처럼
이내 봄은 다시 찾아오고 달은 또 차 올라
그 평면의 양 끝이 둥글게 말려 올려가 가까스로 입체적인 모양새를 갖추기도 한다.
언제부턴가 정면보다는 뒷모습 사진을 찍는다.
아무리 보정을 해도 칙칙한 안색과 무표정의 더께를 감출 수가 없는 까닭이다.
하지만 아무리 뒤돌아서서 셀프 쉴드를 친다 해도 뒷모습 역시 섭섭한 앞모습과 묘하게 닮아있다.
수줍은 듯 납작하게 달라붙은 엉덩이, 아, 숨겨도 튕클 티가 나 ㅠㅠ
삼천변의 가로수가 붉게 물들었다.
밤 벚꽃 곱던 자리에 딱 그 만큼의 밀도로 단풍이 들었다.
곱던 곳이 곱다. 곱던 곳만 곱다.
시간의 쇠락이 되었든, 여자사람 선희의 쇠락이 되었든,
지나치게 전심전력하여 그것의 흐름을 막을 일도, 허탄해할 일도 아니다.
아무래도 괜찮아, 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마음만 사용하면 된다.
그 정도가 좋다.
'A rose for Emily'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학선생님 (0) | 2020.11.19 |
---|---|
하찮음의 하찮지 않음 (0) | 2020.11.18 |
트랜지스터 라디오처럼 (0) | 2020.11.04 |
그냥 춤춰요 (0) | 2020.10.26 |
상처에 대하여 (0) | 2020.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