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썸네일형 리스트형 문장들 중학교 1학년 학기 초에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은 학급 아이들에게 좌우명을 적어와서 발표하라고 하셨다.좌우명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한 우리 촌년들은 여기저기에서 주워온 멋진 말들을 좌우명으로 급조하여 순서대로 발표하였다.내 차례가 다가오자 나 역시 언니의 자습서인가, 일기장의 아랫단인가에서 본 나름 멋진 말을 발표했다.'눈물을 위하여 낭비할 시간은 없다, 바리런이요.''바리런? 바이런 아녀? 영국 시인?''저는 바리런이라고 봤는디요.' 바리런이 되었든 바이런이 되었든, 급조를 했든 세심하게 골랐든그 시절 나름 내 마음에 꽂힌 말이었던 것 같다.중학교 1학년의 좌우명치고는 다소 숙연하지만 말이다. 버튼을 누르면 딸깍하는 경쾌한 금속성의 소리를 내며 열리던 여고시절의 내 군청색 책가방의 안쪽 목덜미에는이름 따위 .. 더보기 100:100 TV 프로그램 중에서 나의 최애픽은 뭐니 뭐니 해도 《나는 솔로》이다.수요 저녁예배의 분주함과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수요일을 기다리는 이유는 바로 그 프로그램 때문이다.최근에는 《나솔 사계》라는 이름의 아류 프로그램까지 생겨서 목요일까지 행복한 날이 되었다.'나는 솔로 26기 현커'나 '17기 옥순의 근황' 등등의 검색어를 자주 집어넣는 덕질 덕에인스타그램을 비롯한 나의 SNS에는 특별히 낯익은 출연자의 얼굴들이 자주 출몰한다. 일반인들의 짝 맺음 프로인 《나는 솔로》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너무 재밌기 때문이다. '고상한 줄 알았는데 무슨 그런 프로를 좋아해?''그 프로가 어쩌간? 한 번 봐봐, 빠질걸?' 해저 모래에 복잡한 원형 패턴을 조각해 암컷을 유혹하는 일본 수컷 복어나배를 흔들며 춤을 추어.. 더보기 second wind "버티고 버티다가 넘어지긴 다 마찬가지야. 근데 넘어진다고 끝이 아니야.그다음이 있어. 너도 KO를 당해 링 바닥에 누워 있어 보면 알게 될 거야.그렇게 넘어져 있으면 조금 전이랑 공기가 달라졌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져.세상이 뒤로 쑥 물러나면서 응원하던 사람들의 실망감이 고스란히 전해지고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바로 그때 바람이 불어와. 나 한테로."(60쪽) 세컨드 윈드, 버티고 버티다 넘어졌을 때 가만히 누워 있으면 그 위로 불어오는 새로운 바람.은정에게도 새 바람이 불어왔다. 은정을 다시 살게 해 준 남해의 이 바다는 정난주의 바다였고 정난주의 바다는 곧 은정 자신의 바다이기도 했다.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난 정난주는 남편의 순교 이후 관아의 노비가 되어 갓 태어난 아들과.. 더보기 새봄이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김중식의 시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부정적 상황에 무척 취약하다.스트레스를 받으면 쉽게 떨쳐내지를 못한다는 얘기이다.여름방학 숙제로 초등학생의 손아귀에 잡혀 골판지에 곤충핀으로 대가리가 박혀진 잠자리처럼그 상황에 .. 더보기 전업 독자 글을 쓰다가 확신이 서지 않을 때면 마틴은 스웨덴에 사는 가르시아에게 연락을 했다.예를 들어 마틴이 이메일로 "내가 전에 이런 대사 쓴 적이 있었나요?"라고 물으면가르시아는 즉각 답장을 보냈다고 한다."네, 4권 17쪽에 나와요."라고.이 열성팬 덕분에 마틴은 자기가 쓰고 있는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에 이름을 가진 등장인물이 무려 천 명이 넘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물론 이 수치에 가장 놀란 사람은 바로 작가 자신이었다.이런 얘기는 모두 문학평론가 로라 밀러의 열성팬들에 의한 작가의 자율성과 신성성 침해에 착목했지만나는 작가가 작품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때로는 독자에게 의존해 작품을 계속 써나간다는 부분이 흥미로웠다.인물과 줄거리를 창조한 작가조차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 가르시아라는 .. 더보기 부끄러움이 밀려오면 고등학교 2학년 미술시간에 양초를 이용한 미술작품을 한다고어떤 종류가 되었든 양초를 가져오라고 하셨다.나는 가장 일반적인 하얀색 양초- 정전이 되었을 때 불을 켜거나굿판에서 쌀 함박지에 꽂던(꽂는 것을 보았던)-를 가져갔다.팔복동에서 살던 내 짝꿍 정천숙이라는 친구는 색색깔의 너무나도 이쁜 가느다랗고 작은 초를 대여섯 개 꺼내놨다.'어머나, 무슨 초가 이렇게 이쁜게 다 있어? 너무 귀엽다.''이걸 다 몰라? 생일케익에 꽂는 초잖아.'나의 얼굴은 화끈달아올랐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도록 우리 집에는 생일케잌이라는 것이등장해 본적이 없었다.본점통에 제과점 하나도 없는 동산촌 시골에서 자란 나에게생일이래야 미역국에 귤 한 봉다리, 혹은 마른 호박 듬뿍 넣은호박떡이 최고의 .. 더보기 엄마가 엄마에게 신혼 때부터 쓰던 겨자색 전자레인지가 고장이 났다.새로 구입하려 쿠팡에 검색을 해보니비싸봤자 15만 원을 넘지 않았다. 막 주문하려는 찰나, 남편이 끼어들었다.'장모님이 쓰시던 것, 아직 그대로 있잖아. 멀쩡하기도 하고 어머님 손때도 묻어있고 좋잖아.' 비싸지도 않은데 낑낑대며 들고 오는 수고대신 그냥 사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어머님 손때 운운하는 데에는 더 이상 반박하기가 뭐 했다. 가계약이 이루어져 매매가 진행 중인 동산촌 집은아직은 막내오빠가 가끔씩 오며 가며 살핀다고는 하지만지지부진한 매매의 절차만큼이나잡풀이 무성하고 동네의 고양이들이 드나드는 폐가가 되어있었다.구석구석이 패인 시멘트 토방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햇볕에 바래 삼색선이 희미해진 엄마의 분홍색 슬리퍼를 한쪽으로 밀며신발을 신은 .. 더보기 아홉 반의 반의 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나관계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 의례적으로 하는 말들이 있다. "언제 밥 한 번 먹자.""너무 염려하지 마, 잘 될 거야.""도울 일 있으면 말해.""위해서 기도할게요." 공허한 말들인 줄 알면서도 때로는 위로가 된다.종일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쥔 손 안에서반갑게 느껴지는 잘 못 걸려온 전화벨의 파동이나번화가의 낯빛 좋은 청년이 아무에게나 베푸는 프리 허그처럼, 이게 진짜 마지막이야, 진짜다.열 번 셀 때까지 안 하면 끝이야.하나두울세엣네엣다섯여섯일곱여더얿아홉! 그 뒤에 느릿느릿 붙이는특별한 숫자, 아홉 반의 반아홉 반의 반의 반처럼.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 망설임의 뒤끝 긴 숫자가우리를 이 지상에 존재하게 만든다. 더보기 이전 1 2 3 4 ··· 6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