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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se for Emily

선아야, 밥 먹어라

 

 

교회도 쉬고, 주간보호센터도 쉬는 요즘의 일요일은

엄마를 돌보기 위해 하루 종일 동산촌의 엄마 집에 머문다.

 

지난주 일요일에는 무료해서 혼자서 동네 골목을 거닐었다. 

이제는 아는 얼굴 거의 없는 옛 골목길,

 

어디선가 저녁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선아야, 밥 먹어라' 손 나팔로 엄마가 나를 부르던 유년의 해 질 녘 고함소리 들리는 듯하여

놀던 고무줄 내려놓고 뒤를 돌아보았다.

 

 

 

 

나보다 한 살 위쯤의 성욱이 오빠네 집 골목.

근처에 시암이 있어서 우리 동네 실리에서 가장 핫플레이스였던 곳이다.

우리 집 우물은 머리를 감으면 뻣뻣해서 가끔 공동 시암에서 물을 길어다가 머리를 감곤 했었다.

양동이에 물을 길어 집까지 가다 보면 절반은 위아래로 샜고

가끔, 보다못한 성욱이 오빠가 불끈 들어서 골목까지 가져다준 기억이 있다.

파란색 페인트가 벗겨진 대문 위에 능소화 덩쿨 무성하고 대문 앞 잡풀만 요란한 걸 보니

빈 집이 된지 오래인 듯하다.

 

 

 

내 친구 현주네 집이자, 이동희 교장선생님의 집.

동네에서 유일하게 초인종이 있던 대문을 들어서면 

동글동글 모양을 내어 다듬어놨던 향나무, 빨강 열매가 달려있던 호랑가시나무, 은행나무...

그 아래 촉촉하게 윤기 나던 연두색 이끼는 우리 소꿉장난의 맛난 떡으로 사용되었었다.

중학교 이래 연락이 끊긴 현주는 경기도 어디에서 산다는 소식만 얼핏 들었다.

그 시절의 어느 날처럼 대문의 초인종을 누르고 냅다 도망치면 멜빵 원피스를 입은 현주가 고개를 내밀까. 

 

 

 

사이사이 틈으로 몸을 밀어넣어 안으로 들어가 술래잡기도 하며 놀았지만 

어두워진 후 이 곳을 지나가는 일은 내 심장이 꽁꽁 얼어붙는 견딜 수 없는 공포였다.

 

죽어라고 뛰어서 지나치기도 했고

주기도문을 외우며 공포를 죽이기도 했고

엄마의 마중을 요구하기도 했던 누군가의 열녀문이라는 정문,

이제는 지붕에 잡풀만 무성하고 새로 들어 선 신식 건물들에 밀려

소복 입은 귀신인들 무슨 힘을 쓸까, 싶다.

 

 

 

... 나도 한때는 그렇게 자작나무를 휘어잡던 소년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걱정이 많아지고 인생이 정말 길 없는 숲 같아서

얼굴이 거미줄에 걸려 얼얼하고 간지러울 때

그리고 작은 가지가 눈을 때려 한쪽 눈에서 눈물이 날 때면

더욱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진다

이 세상을 잠시 떠났다가 다시 와서 새 출발을 하고 싶어 진다

그렇다고 운명의 신이 고의로 오해하여

내 소망을 반만 들어주면서 나를

이 세상에 돌아오지 못하게 아주 데려가 버리지는 않겠지. 

-로버트 프로스트 <자작나무>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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