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할 때 가끔 독립영화관에 간다.
작가주의적 예술성을 지향하는 영화를 상영한다,하는 까닭에
매니아적인 성향을 가지는 관객들이 주를 이룬다고 볼 수 있고
무엇보다도 관객들 자체가 그런 나르시즘적인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보이기도 한다.
문제는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이다.
일반의 영화관에서와는 사뭇 다른 풍경을 볼 수 있는데
독립영화관의 관객들은 그 때 자리를 뜨지 않는다.
엔딩크레딧까지가 영화라는 사실을 시위라도 하듯,
지금 일어나면 하수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일어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럴 때마다 나는 괴롭다.
메인스토리까지로 충분한 영화도 내겐 많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 고요의 시간에 이 생각만 한다.
그만 일어나고 싶다, 벌떡 일어나고 싶다. 그만 나가고 싶다.
내가 하수임을 당당히 커밍아웃하고 싶은 것이다.
앉아있어도 되듯이 일어나 그만 나가도 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塞翁之馬, 변방 노인의 말,
얼마전 우리 교회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새옹지마'의 고사를 인용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에 덧붙여진 예화였다.
문제는 새옹지마의 한자풀이였다.
새옹이라는 사람의 말,이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아이갸나, 왜 저러신대, 우리 목사님,
그 이후로.
누구라도 붙들고 그 실수에 대해서 흉을 보고 싶은 안달이 내 안에서 달달거리기 시작했다.
목회자의 그깟 실수를 까발리는 것은 성도로서 덕스럽지 못하지,
성숙한 신앙인인지 아닌지 내 스스로 시험해볼 수 있는 기회야, 참아야해.
보름정도는 잘 참았다.
하지만 웬걸,
고구마순 듬뿍 넣고 끓인 갈치찌개를 안주 삼아 칼칼하게 마시던 복분자술 서너잔이
그 동안 틀어막아 놨던 안달의 뚜껑을 느슨하게 했을까,
'세상에, 새옹이 사람이름이래, 진짜 웃기지?'
난데없는 새옹타령에 남편은 어리둥절해 했지만
나는 폭발하는 쾌감을 어찌할 수 없었다.
깊은 강물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흐르는 시냇물이 강의 기슭에 부딪치기도 하고 바닥에 소용돌이치기도 하면서
세월의 더께를 입어가며 자연스레 깊어지고 넓어지길 원할 뿐이지
강바닥에 삽질을 하고 싶지는 않다.
앉아 있어도 되고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극장 밖으로 나가도 된다.
티비를 틀어놓고 게걸스럽게 먹는 저녁밥상엔 험담이 최고의 반찬이 되기도 한다.
나는 가끔 고상함보다 인간적인 것이 훨씬 좋다.
천박함을 드러내놓는 쾌감이라니,
소낙비 속을 우산없이 달리는 상쾌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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