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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영화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자신의 자전적 영화인 《파벨만스》에서 난생처음 깜깜한 영화관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주인공 샘에게 하는 엄마의 조언을 통해 ‘영화는 꿈, 영원히 잊히지 않는 꿈’이라고 말한다. 맞다. 영화는 눈으로 꾸는 꿈이다.

나에게도 영화는 작은 꿈이다. 소풍 가서 찾던 보물찾기 쪽지 같은 설렘이다.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마치 잊고 싶지 않은 헤어진 연인에게 그러하듯 한동안 아무 영화도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 뒤돌아보고 되새김질하며 그 여운을 흠뻑 누린 후에야 그다음 영화를 찾게 된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장면들이 그러하듯 각각의 영화도 나의 고유의 기억이나 특별한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나름의 서사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영화를 떠올리면 어떤 특정한 사람이 떠오르거나 또는 영화 외적인 독특한 상황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국민학교 때 전 학년이 강당에 모여앉아 시꺼먼 암막 커튼을 내리고 땀 쭐쭐 흘리며 같이 봤던 반공영화가 아마도 나의 영화감상 이력의 첫 페이지가 아닌가 싶다.

영화다운 영화의 첫 목록은 중학교 1학년 중간고사 마지막 날 단체영화로 봤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이다. 미어터지는 버스를 타고 가서 역시 미어터지는 영화관에서 서서 봤던 그 영화는 흔히들 말하는 비비안 리의 잘록한 허리나 클락크 케이블의 남성다움, 마지막 대사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불겠지.’로 남아있지 않다. 작은 키로 너무 밀리는 관객들의 등짝에 바짝 붙어서 보느라 내내 시달렸던 땀 냄새와 몸의 밀착의 불쾌함으로 남아있으니 그 영화의 명성에 대한 모욕이라 비난한들 어찌하랴.

 

지금도 중학교 동창 친구들은 ‘선희 덕분에 《로미오와 줄리엣》 영화를 봤지.’라는 얘기를 종종 한다. 줄리엣 역의 올리비아 핫세의 미모와 그 영화에 대한 소문을 이미 알고 있던 우리는 역시나 단체영화 관람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학생주임 선생님은 학사 일정상 불가능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내성적이었던 내가 무슨 용기로 그랬는지 단체영화 관람을 시행해 달라는 간청을 담은 편지를 그 선생님께 드렸던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역시 밀리는 버스를 타고 가서 밀리는 영화관에서 그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대만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는 아들이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난 뒤 한동안 카톡 프로필 사진에 올려놨던 영화 속 대사로 기억된다. ‘나도 널 좋아했던 그 시절의 내가 좋아.’라는 남주인공 커징텅의 대사로 이별의 아픔을 다독이며 젊음의 한 시절을 통과하고 있는 아들과 그 아들을 보며 몰래 같이 아파했던 속수무책의 나를 동시에 위로해 준 영화였다.

아들이 처음 카페를 오픈하던 날 ‘돈 많이 벌려고 너무 애쓰지 말고 느긋하고 온화한 너의 고유의 세상을 만들어 가기’를 당부했던 나의 손편지는 헬싱키를 무대로 한 영화 《카모메 식당》을 염두에 두고 한 소망이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 영화 속 미도리처럼 눈을 감고서 손가락으로 아무 곳이나 찍어 그곳으로 여행 가기를 꿈꿔본 적도 있다.

늦여름의 하늘을 좋아하는 계기가 된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시간을 달리는 소녀》, 상실의 깊이를 뛰어넘도록 나의 손을 잡아줬던 《걸어도 걸어도》, 내게 최고의 사랑 영화 《첨밀밀》, 품격있는 불온한 사랑을 꿈꾸게 했던 《화양연화》, 편견이 편견임을 알게 했던 《필라델피아》와 《브로크백 마운틴》. 어디 그뿐이랴. 삶에 대해 마음으로 보는 시선을 열어준 《올리브 나무 사이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등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들, 나 자신의 허세뿐만 아니라 타인들의 위선의 무게로부터 가벼워짐으로써 오히려 삶을 진절머리 나게 사랑할 수 있게 해준 홍상수와 김기덕의 영화들···.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외침으로써 죽음 직전의 주인공을 살려냈던 《굿 윌 헌팅》의 배우 로빈 윌리엄스나 외롭게 맘보춤을 추던 다리 없는 새 《아비정전》의 장국영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관객을 살리고 정작 자신을 살려내지 못한 그 배우들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소리치고 싶었었다.

IT’S NOT YOUR FAULT!!

 

영화관의 조명이 꺼지고 두세 명의 어린아이들이 섬에서 폭죽을 쏘아 올리는 우리나라 유명 영화 배급사의 광고나 쿵쿵 쿵쿵, 영화 시작의 설렘을 알리는 20세기 폭스사의 광고가 끝나고 순간 실내가 고요해지면 내 마음은 나니아 연대기의 벽장 문 앞에 선 소녀가 된다. 새로운 세상으로 나를 이끄는 출입문 앞에서 내 마음도 쿵쾅거린다.

 

내가 영화를 보는 이유는 독서를 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재밌기 때문이다. 독서가 쾌락이듯 영화 역시 내겐 쾌락이다. 가지각색의 알록달록한 세상의 모양들을 스크린을 통해 깊이 경험하고, 때로 동일시하고, 때로 힐난하며 잠시 그들의 삶을 같이 살아낸다. 그래서 수많은 글자가 서서히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이 끝나고 비로소 의자에서 일어설 때가 되면 나는 훨씬 고요해져 있다.

 

지미라는 작가는 그림책 《인생이라는 영화관》의 작가 후기에서 ‘삶에서 갈 곳을 잃었을 때 잠시나마 숨을 곳과 무한한 힘을 준 것에 영화에게 감사한다.’라고 말했다. 나 역시 어딘가로 숨고 싶을 때도, 좀처럼 마음에 햇빛이 들지 않을 때도, 정처 없이 쓸쓸할 때도 혼자 영화관을 찾는다. 그럴 때마다 영화는 희망이라는 공허한 위로보다는 적나라한 삶의 절망이나 고만고만한 인생들을 서슴없이 보여주곤 한다. 다만 앵글의 각도를 조금만 바꾸는 것만으로도 달라지는 세상을 보여줌으로써 내가 마주하고 있는 사사로운 것들로부터 압도당하지 않을 힘을 얻게 해준다. 그래서 지상의 삶을 살뜰히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 땅에만 시선을 처박고 살지 않는 비법을 조금씩 배우게 된다. 종잡을 수 없는, 이것이면서 저것인 그러나 이것만도 아니고 저것만도 아닌 세계를 봄으로써 조금 더 고요한 사람이 된다.

 

나의 생명이 다한 후, 지나간 인생을 파노라마처럼 필름을 되돌려볼 일이 있다면 아마도 퇴근 후 나른한 몸을 이끌고 혼자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고 나와 한참이나 말이 없어진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봄밤의 풍경을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뽑을 것 같다. 내가 바라는 행복이나 안정된 삶의 기준 역시, 그것이다. 영화를 볼 수 있을 정도의 삶, 그 정도면 족하다.

 

어딘가에서 토토가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는 듯한 ≪시네마 천국≫의 주제가가 꽃잎처럼 흩날리는 봄날이다. 나는 오늘도 영화관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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