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데기처럼 바짝 쫄아서 보낸 일주일이었다.
건강검진 결과 장기의 한 부분에 수상쩍은 흔적이 보여 조직검사를 권유받아 시행했던 것이다.
의사의 갸우뚱거리는 고갯짓은 나비의 날갯짓보다 훨씬 작은 몸짓이었지만
그 후폭풍은 나의 일주일을 태풍 속에 몰아넣었다.
집에 돌아와 불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어둑어둑해지는 창밖을 바라보노라니
이게 뭐람, 또르르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내게 새로운 봄날이 몇 번이나 더 남았을까.
enough, it's enough.
한 생애의 기럭지가 이 정도면 충분하지 뭐.
3, 40대도 아니니 요절도 아니고 슬픔도 행복도 흠뻑 누린, 적절하게 깔끔한 나이지 않은가.
두 아들도 다행히 다 커서 엄마의 부재가 삶을 휘청거리게 할 만큼은 아니겠고
남편은 몇 년 근천 떨다가 재혼하겠지.
엄마는 천만다행 치매라서 도마뱀의 꼬리가 잘리듯 또 한 명의 자식이 사라진 것을 알아채지 못하시겠지.
아, 우리 오빠들과 언니 어쩌나, 형제를 연이어 잃게 되는 슬픔을 겪다니 좀 마음이 아프긴 하지만
죽 그릇의 숟가락 흔적처럼 이내 평온해지겠지.
괜찮아, 괜찮아.
하루가 더 지나니 좀 더 현실적인 생각의 정리가 필요했다.
5년 정도 남은 정년퇴직을 내년 초로 당겨 명예퇴직으로 마무리해야겠다.
정년에 맞추어 붓고 있는 두 어개의 적금을 해지하고 명퇴금은 홍균이 결혼비용으로 쓰고
연금은 일시불로 받아 재혼을 비롯한 남편의 노후자금에 보태야겠어.
돈 없는 노인네한테 누가 시집 오겠는가.
그리고 주문을 외우듯 수시로 나의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하나님, 이젠 진짜로 잘 살게요. 한 번만 봐주세요. 긍휼을 베풀어주소서.
"결과는 언제 나와?"
"4~5일 걸린대. 전화로 알려준댔어."
"별 일 없을 거야."
"어."
여느 때처럼
청국장을 끓이고
구운 갈치의 가시를 바르고
세탁기를 돌리고
드라마를 보고
싱크대 위의 물기를 닦고
손톱을 깎고
단톡방에 이모티콘을 올리고
화분에 물을 주고
마른 잎을 따내었다.
그런데 그 사소한 일상 위에 작은 방. 점. 들이 살며시 얹어지고 있었다.
다 밑줄을 칠 수 없어서 그냥 밑줄을 생략한 낱낱의 반짝이는 문장들과도 같았다.
금요일 오전부터는 울리는 모든 전화벨 소리가 공포스러웠다.
퇴근 무렵에 063으로 시작하는 전화가 왔다.
벌벌 떨며 핸드폰을 열었다.
암은 아니란다.
살.았.다.
일요일 예배시간에 특별감사헌금을 드렸다.
'작은 자의 기도에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비록 일주일 동안 하나님과 무언의 딜을 하며 마음 속으로 작정했던 헌금에서
동그라미를 하나를 떼어낸 액수이긴 하지만.
월요일 점심시간
같은 식탁에 앉은 두엇의 동료들이 여기저기 풍광 좋은 곳에 마련한 세컨드 하우스를 자랑하느라
바빴지만 부러운 척을 해줬을 뿐 그런가보다, 정도였다.
식사 후 산책길을 걸으며 하늘을 향해 단풍잎처럼 손가락을 활짝 펼쳐봤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뚝뚝 떨어지는 알록달록 가을 빛, 이 참을 수 없는 황홀!
나를 전율케 하는 세상의 모든 풍광이 모두 나의 세컨드 하우스인걸.
죽음을 잠시 유예받은, 한없이 유한한 필멸(mortal)의 작은 자들 우리에게
이 지구는 잠시 잠깐 머무는, 붉은 칸나가 핀 작은 정거장이고
그리고 우리는 잠시 소풍을 나온 여행자이다.
두근두근 소풍길이다.
설레지 아니한가.
휘청거릴 때마다
견고하게 세상을 딛고 있던 손에서 나는 힘을 빼게 되고
칸나의 뜰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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