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ose for Emily

트랜지스터 라디오처럼

Tigerlily 2020. 11. 4. 14:15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카론 영감은 지옥의 뱃사공이다.

망자를 저승으로 실어나르는 일을 했던 그는 뱃삯으로 동전 한 푼씩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 그리스에서는 죽은 자를 장사 지낼 때 입 안에 동전 한 푼씩을 넣어줬다고 한다.

무임승차를 하려다가는 괴팍한 카론 영감의 노로 두들겨 맞았다고 하니, 저승길도 쉽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카론 영감의 배를 타고 스틱스 강을 건너면 마지막 코스로 망각의 강, 레테를 건너야 했다.

이 강을 건너야만 이승에서의 모든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한다.

레테는 불화의 여신 에리스의 딸이라는 설이 있다.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분풀이로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쓰인 황금사과를 던짐으로써

세 여신 사이에 불화를 일으켜 결국 트로이 전쟁의 도화선이 된 그 사건의 제공자, 바로 그 에리스다.

 

이승에서의 모든 기억을 깨끗이 잊어버리는 망각과 불화의 해결 사이에

분명 관련이 있음을 유추해볼 만도 하다면 억측일까.

 

한 계절에 한 번 만나는 네 명의 E.T.(English Teacher)들의 모임 '알로하' 회식이 며칠 전 있었다.

형편도, 성품도, 외모도, 마음씀도 다들 고만고만하여 편안하다. 

예의바름이 간격을 만들지 않고 솔직함이 누추함이 되지 않으며

다정함이 감정을 침범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 완만한 품성과 신뢰 덕분이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시나브로 이어진 이야기는

서빙하는 여자가 자꾸만 눈치를 주는 영업 종료 시간 무렵까지 이어졌다.

애도 어른도 아닌 다 큰 자식들,

애가 되어가는 남편,

남의 자식이어서 천만다행인 학교의 문제애들에 대한 뒷담화로 채우던 우리의 이야기는

늙은 노부모 돌봄에 대한 한숨으로 이어졌다.

 

"요즘도 나는 가끔 울 엄마 꿈을 꿔요. 근데 깨고 나면 겁나 우울해.

겨우 가라 앉혀진 흙탕물이 휘저어졌다고나 할까..

60대에 치매에 걸리셔서 20년을 요양병원에서 고생하시다 가셨거든.

병문안을 가면,

 '참 고맙소, 근데 누구신디 이렇게 나한테 잘해 준다요?' 하시던 그 낯선 표정을 바라보는 막막함이란.."

 

진안 부귀댁 미숙샘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이십 대 초반의 연둣빛 나이에 거친 방법으로 유명을 달리한 큰 딸에 대한 회한으로

그 나머지 삶을 자책과 절망으로 연명하다 일찌감치 몹쓸 병에 걸리신 것 같다는 얘기와

치매 아내를 돌보다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미숙 샘, 생각하지 말게요."

 

작은 스테인리스 스위치를 돌리면 또각 소리를 내며 꺼지던 트랜지스터 라디오처럼

힘겨운 기억 속을 걷고 있는 미숙 샘의 손을 잡고 그 기억으로부터 꺼내 주고 싶었다.

평화로운 일상은커녕 생존까지도 위협하는 와글거리는 거친 기억들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던가.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부터 살아남는 방법은 떠올리지 않는 것이다.

꼬리를 밟힌 도마뱀이 자신의 몸의 일부를 잘라내며 도망쳐 살아남듯

극복되지 않는 것은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수밖에 어찌하랴.

때로는 망각이 우리의 생존을 돕는다.

 

망각의 강 레테가 불화의 여신 에리스의 딸이라는 이야기는 위로가 되기도 한다.

망각이 어쩌면 화해와 치유의 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는 처방전으로 보이는 까닭이다.

 

코로나로 인해 마스크 미인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얼굴의 절반을 마스크로 가리다 보니 거의 모든 사람들이 괜찮아 보인다.

가릴수록 이쁜 것은 얼굴만이 아닌 듯하다.

부러지기 쉬운 우리 삶을 살살 달래며, 어르며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