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ose for Emily

내 애인 데카르트

Tigerlily 2020. 6. 16. 14:29

 

'남자들 대부분 괴물 아니던가?'

 

며칠 전 친구와 얘기를 나누던 중 내가 한 말이다.

나의 그 말에 별다른 거부의 리액션이 없었던 걸 보니 크게 틀린 말은 아님을 인정하는 듯했다.

아니면 그도 괴물이던가.

 

'사람 되기도 어려운 세상, 괴물은 되지 맙시다.'라는

유명한 대사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 나온다.

주인공 경수는 춘천행에서 우연히 만나 자신에게 호감을 표현하는 무용수 명숙과 하룻밤 잠자리를 갖는다.

그렇게 헤어진 명숙이 전화를 걸어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유혹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조언을 구하자

그때 그녀에게 경수가 하는 말이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자신은 결코 괴물이 아님을 반증하는 듯한 이 표현은

돈이 없어 영화 제작이 힘듦에도 자신의 돈만 챙긴다는 이유로 영화사 선배로부터 경수 본인이 이미 들은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춘천을 거쳐 경주행 기차에 오른 그는 기차 옆자리에 앉은 유부녀 선영에게 반하여 그녀을 꼬득여

그녀와도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정작 괴물은 경수 자신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괴물 아닌 사람 찾기가 어렵다.

 

한국어 제목 '생활의 발견'은

영어로는 'On the occasion of remembering the turning gate'로 번역되어 있다.

한 영화 속에서 동일한 표현이 세 번이나 반복되면서 비아냥의 대상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도는 회전문의 형상을 이룬다.

(영화 속 회전문(turning gate)은 춘천의 청평사에 얽힌 에피소드의 실재적 사물이지만.)

'순진하기는... 너 아직도 몰랐어? 우리 인간의 생활이란, 유사 괴물의 그것일 뿐이야.

그게 삶이라니까. 뭘 기대해.'

 

'나 좀 믿어줘.'의 또 다른 번역은

'나 좀 속아줘.'나 '대충 믿어주고 넘어가면 안 될까? 나 급한데.' 쯤 될 것이다.

 

 

나는 사랑을 믿지 않아, 라는 말을 일 삼아 쓰던 어설프게 젊은 날이 있었다.

이 짧은 말을 중언부언하여 늘여본다면

'내가 사랑을 믿지 않게 된 연유는 그 놈들이 나를 그렇게 만들기도 했지만, 사실은 나도 오십 보 백보거덩. 내가 해봐서 잘 알아.'가 될 것이다.

 

말죽거리에서 놀던 권상우를 흉내 내어 본다면

'사랑? X 까라 그래.' 다.

 

하지만

누군가는 사랑을 예쁨의 발견,이라고 묘사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어쨌거나 많이 헤어진 자는 사랑에 빠진 적이 많은 자이고

많이 사랑한 자는 예쁨을 많이 발견한 자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자주 매혹되는 자이다. 아름다움에 쉽게 마음을 팔리는 자이다.

아름다운 자라는 기괴한 삼단논법의 수혜자가 된다.

 

함성호의 시 <낙화유수>에서처럼

징징대는 지난 애인의 애절을 찰나적 잠시 동안만 통한할 뿐

새로운 사랑의 가지로 날아가는 잔인에 대해서 아무 죄가 없는 것이다.

운명이라고 해도, 잡놈(잡년)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예쁨을 발견한 것이다.

배신도, 변절도, 바람도 아닌

또 하나의 사랑이다.

 

그런 까닭에 그 옛날 사춘기 적 암송했던 싯구절처럼

깊이 사랑하되 너무 깊이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작별이 오면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악수를 할 만큼만.

 

 

그이가 말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대답했다.

집어 쳐요, 그 딴 말

생각하지 않고 사랑할 순

없어요?

.... 장정일의 '내 애인 데카르트'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