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ose for Emily

깜박 잊고

Tigerlily 2020. 6. 8. 10:57

 

 

카산드라는 예언 적중률 100%의 예지력을 가진 그리스 신화 속 여자이다.

카산드라가 트로이 군에게 목마를 도시 안으로 들여보내지 말라고 예언과 경고를 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고 무시해 버렸기 때문에 트로이는 그리스 연합군에 패배를 당했다.

 

그녀의 백발백중 예지력은 그녀를 사랑한 아폴론이 그녀의 마음을 유혹하기 위해 선물로 준 것이다.

하지만 인간 카산드라는 아폴론의 신성을 질투하여 그의 사랑을 거부하였고 이에 진노한 아폴론이

추가로 준 선물이 바로 '아무도 그녀의 예언을 믿지 않는' 일종의 저주였다.

 

그야말로 신은 카산드라에게 최고의 예지력을 주셨지만

동시에 최저의 설득력을 주신 것이다.

 

 

 

 

얼굴 화끈거리는 '작가'라는 이름을 붙이고

<제 3회 스튜디오 오로라 일러스트 그룹전>에 참여했다.

화실을 다니며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지가 벌써 4년이 되어 전시회에 참여한 게 두 번째가 된다.

사실, 예닐곱명의 참여작가 중 가장 처지고 떨어진다.

그럼에도 부끄러운 마음의 한 켠에 있는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숨길 수 없어 

알리는 척, 안 알리는 척, 슬쩍 슬쩍 알렸다.

 

전시회 오픈식에서 우리의 그림 선생님은 나를,

'숨겨놨다가 전시회 때마다 꼭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소개함으로써

할머니가 될 때까지도 그림을 계속 하고 싶다는 충동 같은 만용을 불러일으켰지만

젊고 재능있는 수강생들의 대작들 속에서 소품 위주의 내 그림들이 초라함은

어쩔 수 없었다.

 

재능이 없는 까닭에 갈수록 실력이 팍팍 느는 것 같지도 않지만

그림 그리는 게 즐겁고 행복하다.

월요일 7시에서 10시까지의 화실에서의 시간, 그 어두운 골목길의 가로수,

화실로 올라가는 계단, 그곳의 형광등과 물감 냄새...

번트 시엔나 물감같은 지루한 날들 속에서 한쪽 모서리를 밀고 내딛는

버밀리언 휴 빛깔의 나니아의 벽장문이다.

풍경이나 사물을 볼 때도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폴론이 카산드라에게 뛰어난 예지력을 허락하고서 설득력을 빼앗아버린 것처럼

어쩌면 신은 내게 사그라들지 않는 호기심을 선물로 주시면서

재능 주시는 것을 깜빡 잊으신 것 같다.

 

그림을 그리는 것, 글을 쓰는 것,

또 요즘 시작한 피아노...

내겐 이번 생애에서 꼭 해보고 싶은, 잘 하고 싶은, 호기심의 조각들이다.

그 외에도 끝없이 있지만.

60세의 두번째 수필집, 70세의 개인 전시회, 80세의 방구석 연주회...

또 그런 결과물이 없으면 뭐 어떤가.

 

 

별 볼 일 없이 건조한 삶에 별 빛을 섞는 일이다

설레임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