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시면서도
# 1.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
마지막으로 방학 집합연수를 받은지가 언제였던가.
5, 6년전 사진연수를 끝으로 일체의 연수를 마감했었다.
언젠가 이후로
내게 남아있는 교직 년수의 물리적 숫자보다 마음의 보따리를 일찌감치 싸 버린 탓이었다.
'이 나이에 무슨 빌어먹을 전문성 함양이야, 내가 하고 싶은 것 하면 되지.'
일찌감치 자발적 뒷방마님의 자리를 꿰어차게 된 것이랄까 ㅎㅎ
이번 방학에는 정말 오랫만에 연수를 신청하여 받았다.
길고도 긴 겨울방학을 방안에 처박혀 보내는 무료함도 덜어내고 싶었고
전교조에서 주최하는 <북 스타트>라는 주제에 마음이 조금 팔리기도 한 까닭이었다.
참 괜찮았다. 행복한 일주일이었다.
독서토론, 책모임, 성인지 감수성과 학교, 보드게임과 책놀이, 동학농민 혁명, 노동운동사...
곳곳에서 영혼 다해 열심히 살아가는 삶의 내용으로 세상을 구체적으로 바꿔가는 사람들(강사들)에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예민함도 능력이다,
좋은 이야기는 덜 폭력적인 사람으로 만든다,
모든 사람이 평화로운 것은 불가능하며 그 불가능을 약자가 인내함으로써 가능한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 평화다.
위장된 평화에 균열을 내고 불편한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게 예민함의 시작이고 문제해결능력을 키우는 첫 단계이다.
내 가슴에 다가와 내 고개를 들게 한 몇 마디들이다.
읽고 싶은 책의 목록도 수북히 쌓여졌다.
일주일의 연수가 끝나는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고 싶은 일들이 더 생겨서, 나보다 열배나 괜찮은 사람들을 만나서, 삶의 불안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다시 깨달아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서는 곳의 높낮이를 달리 해가며 여러 풍경을 보고 싶은 1월이다.
# 2. 2:15, 4:20
언제부턴가 그렇게도 맛나던 잠이 맛탱이가 없어졌다.
통놈으로 푹 잘 때가 없다.
푹 잤다고 생각하고 눈을 떠보면 새벽 2시 15분,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다가 다시 눈 뜨면 4시 20분...
'무릎을 베고 누우면 나 어릴 적 그랬던 것처럼 머리칼을 넘겨줘요
그 좋은 손길에 까무룩 잠이 들어도 잠시만 그대로 두어요 깨우지 말아요'
불면에 관한 노래 <무릎>을 부른 아이유는 언제부턴가 불면을 자신의 삶의 일부로 여기며 산다고 했다.
나 역시 요즘에는 새벽에 잠이 깨면 다시 잠에 기어들어가고자 삐대지 않는다.
그냥 거실로 나와 책도 읽고, 티비도 보고, 글도 쓴다.
그 고요가 생경하도록 낯설지만은 않다.
그러다보면
어제와 오늘의 경계, 낮과 밤의 경계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다 지나버린 오늘을 보내지 못하고서 깨어있어 누굴 기다리나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던가
그것도 아니면 돌아가고 싶은 그리운 자리를 떠올리나'
# 3. 말해뭐해 쏜 화살처럼 사랑도 지나 갔지만 그 추억들 눈이 부시면서도 슬펐던 행복이여
<아모르 파티>를 틀어 놓고 엄마와 막춤을 추었다.
곱씹어 볼수록 김연자의 이 노래는 명곡이다.
곡도 곡이지만 이 삼류소설같은 가사의 진정성이라니.
일년에 한번씩 하는 치매검사를 몇 일 전 다시 했는데 점수가 거의 빵점에 가깝게 나와
어쩔 수 없이 약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날씨도 춥고, 겨울 방학이고 약에 대한 적응의 추이을 보느라 당분간 엄마를 우리집으로 모셔왔다.
민들레처럼 곱고 단정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계신다.
정신없이 바쁜 막내딸 안쓰러워하는 것 또한 여전하다.
하지만
장갑을 양말인 듯 발에 꿰고 있고,
화장실 뒤처리는 커녕 자꾸만 변기에 손을 넣으신다.
밥을 떠 넣어주지 않으면 반찬만 드시고 있다.
엄마가 좋아하는 간장게장에 감자전을 부쳐 아침을 드리고
유자청 듬뿍 넣어 유자차도 드렸다.
<아모르 파티>에 맞춰 절구통 춤을 추는 나를 보고 함박 웃음을 지으시길래
손을 잡고 일으켜 같이 추었다. 아, 눈물이 났다.
우리 엄마에게도 쏜 화살처럼 지나간 사랑도 있었겠지,
그 추억들, 눈이 부시면서도 슬펐던 행복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