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ose for Emily

독립하되 고립되지 않는

Tigerlily 2019. 12. 13. 13:35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벌 나비를 생각해야만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 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얼레지...

남해 금산 잔설이 남아 있던 둔덕에

딴딴한 흙을 뚫고 여린 꽃대 피워내던

얼레지꽃이 생각이 났습니다

꽃대에 깃드는 햇살의 감촉

해토머리 습기가 잔뿌리 간질이는

오랜 그리움이 내 젖망울을 돌아나게 했습니다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이래

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

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

봐,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아

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

얼레지는 얼레지

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

- 김선우의 시, '얼레지' 전문



김영민은 그의 책 『동무와 연인』에서

기다리기와 만지기, 애태우기와 속 끓이기, 시간의 지체와 변죽 울리기 등의 연애의 도착적 특성들을 나열하며

'목욕물과 함께 아이까지 버리는 치명적인 낭비'라는 표현으로 연애의 본질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종교와 더불어 인류의 최대의 양대 환상인 연애가 창조적 열정과 호혜적인 관계를 맺기 위한 토대가 되기 위해서는

상호인정이 필수라는 말을 덧붙였다.


세기의 불륜커플 하이데거와 아렌트가 평생이랄 수 있는 50여년의 세월 동안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의 육체가 상한 고기처럼 삭아갈 때에도 그 둘 사이에 '살'대신 '말'을 가운데 둠으로써

'지적반려'라는 상호인정이 가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침, 출근을 하기 전에

오늘 입을 헤링본 모직스커트 속치마에 클립을 두 개 꽂았다.

정전기 방지용이다. 네이버가 준 지혜가 그야말로 신박하다.

찰싹 달라붙는 스커트를 다리에서 연신 떼어내는 일은 참 모냥빠지는 일이기에

스커트를 즐겨입는 내게 겨울철의 정전기는 쥐약이다.


화학섬유 원사의 레깅스와 모직스커트 사이에 끼어든 금속성의 작은 클립 하나는

둘 사이의 마찰에 의해 발생하는 정전기를 차단하는 하나의 작지만 아름다운 거리(distance)가 되었다.








이상우가 부른 노래, <그녀를 만나는 곳 100m전>이라는 가사에는

연인을 만나러 가는 길의 한 남자의 설레임이 알록달록 향기나게 나풀거린다.


'장미꽃 한송이를 안겨줄까
무슨말을 어떻게 할까
머리속에 가득한 그녀 모습이
조금씩 내게 다가오는 것 같아
하늘에 구름이
솜사탕이 아닐까
어디 한번 뛰어 올라 볼까'


하늘로 통통 뛰어오를 것 같은 터질듯한 기대감은

어쩌면 그녀와 그 사이에 끼어든 100미터라는 물리적 간극이 상승시켜준 설레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작은 돌맹이들과 물의 흐름이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졸졸 아름다운 시냇물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

더 많은 물소리를 들을 욕심으로 돌맹이들을 모두 치워버리자 강은 더 이상 그 시냇물 소리를 내지 못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라는 쉬운 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절망을 표현한 기형도 시인도

그 상실의 원인을 '너무도 가까운 거리'에 두었잖은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나 넘치는 열정은 그 간격을 순식간에 무너뜨려 인간적 예의까지도 침범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연인이 되었든, 친구가 되었든, 그 예속성으로 인해 뭘 해도 용인될 것 같은 가족관계에서조차 

그 관계에 품위와 아름다움을 지속시켜주는 가장 큰 힘은 '품격의 거리 유지하기'인것 같다.

새끼 손가락보다 작은 클립 하나, 물고기의 은신처도 못되는 하잘 것 없는 강물 속 돌맹이들이 만들어 내는 불빛들처럼.



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 참숯처럼 뜨거워질 수 있는 얼레지꽃처럼

스스로 봉오리를 열어 오르가즘에 도달할 수 있는 황홀한 자만(自慢)을 갖춘 자만이 어쩌면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일과 존엄의 거리를 유지하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르바가 그렇게도 좋아했던 달디 단 체리와도 같이

완벽히 소유하고 싶어 환장할 것 같은, 내가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들,

그것들이 다듬어지지 않는 내 열정으로 손상되지 않고, 헛되이 소모되지 않게

자신들의 아름다운 빛깔로 여전히 존재할 수 있도록

뒤로 돌아 한발짝 물러서 거리를 만들어보고 싶은 겨울 아침이다.

'독립하되 고립되지 않는' 관계, 그런 잠잠히 당찬 삶을 생각해 보는 12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