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남들의 세계사
- 그러니까 아무것도 읽지 못하고, 아무것도 읽을 수도 없는 세계.
눈앞에 있는 것도 외면하고 다른 것을 말해 버리는 세계, 그것을 조장하는 세계(전문 용어로 '눈 먼 상태'되시겠다.),
그것이 어쩌면 '차남들의 세계'라고 말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 그것 또한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우리 이야기에는 한 가지 진실이 더 숨어 있다.
이미 눈치챈 사람들도 있겠지만...
후에 나복만이 모든 희망을 잃고 어떤 죄를 짓게 된 것 또한 바로 그 진실을 목도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진실을 깨닫게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날 자재 창고 안으로 들어온 친절한 안기부 요원이었다.
- 이기호, 《차남들의 세계사》, 179쪽-
'들어 보아라.'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장편소설은
챕터마다 이러한 종류의 마음의 자세를 주문하는 명령문으로 시작된다.
몇 개만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자, 이것을 창문을 활짝 열고 담배라도 한 대 피우면서 들어 보아라.
자, 이것을 떠나간 옛 애인들을 떠올리며 계속 읽어 보아라.
자, 이것을 잉크 한 방울 뚝 떨어진 습자지를 생각하며 읽어 보아라.
자, 이것을 당신이 지닌 비밀들을 떠올리며 마저 읽어 보아라.
자, 이것을 당신 안에 숨어 있는 어떤 괴물의 모습을 상상하며 천천히 들어 보아라.
자, 이것을 다시 조금만 더 헤르만 헤세에게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들어 보아라
자, 이것을 굿바이, 연인과 헤어지는 심정으로 들어 보아라.
...
평생 어길 법이라고는 도로교통법밖에 없을 법한 택시운전사 ‘나복만’이
사소한 접촉사고로 인해 엉뚱하게 사건에 연루되어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달라져 버리는
기가막히는 우리의 현대사의 한 부분 속 한 차.남.에 대한 이야기이다.
열 페이지 정도 읽고서 바로, 작가 이기호라는 이름을 검색하여
그의 책 중에서 다른 한 권을 바로 주문했다.
그야말로 그의 걸출한 입담에 마음이 팔려버렸기 때문이다.
머리가 벗겨진 한 인간이 짓누르던 미친 시대의 슬픈 이야기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장난기 가득한 입담과 필체로 인해 오히려 페이소스가 진하게 상승되어진다.
개인적으로 혼자 킥킥대었던 에피소드는
소설 속에 나오는 한 불륜녀의 이름 때문이었는데,
아 이런, 반가워라.
-김상훈은...그의 주장대로 그대로 우발적인 범행으로 인정돼
대법원에서 징역 7년 형을 선고받고 다음 원주교도소에서 만기 복역하였다.
그는 그 와중에 결혼도 하게 되었는데, 상대는 예전 그와 관계를 맺었던
학부형 중 한 명인 조선희였다.(그녀는 곽병희가 2년 연속 반장을 할 때 함께 부반장을 맡았던 김미영의 엄마이기도 했다.)
- 1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