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ose for Emily

You are so different.

Tigerlily 2019. 8. 22. 16:47



김시오는

내가 다니는 화실의 그림선생님 이름이다.

처음 친구로부터 전화번호와 이름이 적힌 쪽지를 건네받았을 때

그 중성적인 느낌의 이름이 주는 매력에 훅 끌려 이미 절반은 마음이 넘어갔었다.

직접 경험해보니 그녀는 남달랐다.

타인의 시선에 개의치 않는 도도함,

그러면서도 맨날 연애하고 싶어 죽겠다는 30대 후반 처녀의 엄살,

애완견 동동이를 보내고 한 달간 화실 문을 닫는 몰랑몰랑한 감성. 

동시에 불의를 보고 결코 참지 못하는 무서울 것 없는 드센 쌈닭.

그녀의 이러한 복합적이고 풍요로운 이미지는 김시오라는 시크한 이름과 어우러져

누구도 아닌 김.시.오.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녀에게 꽃 선물과 함께 작은 쪽지를 건넨 적이 있다.

Sio, you are different.


그런데 한 달이 지나 수강료를 입금하다가 깜딱 놀랐다.

김시오가 아니라 서경옥이었다.

아, 뭐 이런 상실감을 넘어 배신감이라니.


네, 선희샘, 제 본명이에요, 서경옥.

김시오는 그냥 필요해서 쓰는 거고요, 서경옥, 저한테 딱 어울리죠?

역시 그녀다웠다. 김시오면 어떻고 서경옥이면 어떤가.

디스크가 터지도록 밤새워 몇날 몇일 그림을 그리는 그녀,

그러다가 불현듯 인도로, 이집트로 홀로 무한정 여행을 떠나는 그녀.

김시오이든, 서경옥이든,

그녀가 남다르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저를 앤이라고 부르실 거면 e가 철자로 들어간 앤(Anne)으로 불러주세요.

그건 많이 달라요. e가 들어간 것이 훨씬 근사하게 보여요,

아주머니는 이름이 불려지는 걸 들을 때 마치 인쇄되어 나온 것처럼 이름의 철자가 떠오를 때가 없나요?

Ann보다는 Anne으로 불려지는 것이 훨씬 근사해요.

e자가 들어간 Anne으로 불러주신다면 코델리아라고 불리는 것은 포기할게요."


<빨강머리 앤>에서 처음 만나 이름을 묻는 마릴라에게 앤이 하는 말이다.

Ann이나 Anne이나 사운드는 같기에 그게 그것이겠지만

e가 붙은 Anne은 훨씬 달라보인다는 고집이다.

A-n-n-e looks so much more distinguished.



한 끗 차이이다.

그 한 끗의 다름이 모양새와 품격의 차이, 때로는 인간다움과 존엄을 만들기도한다.

내가 나라는 사실을, 나는 다르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

발이 부르트도록 순례길을 홀로 걷는 이가 있고

궁핍과 좌절의 상황에서도 책을 사고 글을 쓰는 외로움의 길을 택하는 이가 있다.

또 누군가는 그것을 증명할 길이 따로 없어서 죽음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냥 Ann이 아니라 e가 붙은 Anne으로 불리는 일,

자신의 이름에 적합한 소중한 가치를 지켜내는 일,

그것이 우리가 배운 존엄을 더하는 일이라면

부려볼 까딸이고 고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