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ose for Emily

꽃을 밟지 않으려 뒷걸음을 치던 너와 부딪혔어

Tigerlily 2019. 6. 20. 15:30



이름만 겨우 알고 지내는 남자 동창, 심문섭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찌어찌하여 나의 책을 읽게 되었고 주변 지인들에게 선물하고 싶으니 책에 싸인을 해달라는 이야기였다.

고맙다고, 주소 알려주면 원하는 부수대로 싸인을 해서 보내주겠노라고 했더니

이미 책은 샀으니 직접 만나서 싸인을 해달라는 것과 책 내용에 대해 몇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귀찮다는 생각에 짜증이 몰려왔지만

후루꾸 신삥 작가로서 처음 접해보는 적극적이고 독특한 독자라는 생각도 들었다.



비내리는 토요일 저녁

아내가 직접 운영한다는 송천동의 한 카페를 찾아갔더니

평소 친하게 지내는 듯한 또 다른 여자 동창 둘이 동석하고 있었다.

어릴 적 이후로 만나본 적이 없는 심문섭이는

작은 교회의 종치기 집사같은 선하고 순한 이미지 그대로여서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야간에는 글을 모르는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국어선생을 하고 있다는 그의 아내가 만들어 내온 대추차를 마시며

A4용지 가득 준비해 놓은 질문에 대충 대답을 하는데 밖의 빗방울 소리가 나의 목소리보다 더 컸다.




황당한 일은 그 다음에 또 이어졌다.

자신의 옆집에 사는 버스기사를 부르고 싶다는 것이었다.

난데없는 웬 버스기사인가 했더니, 최근에 그 역시 책을 출간해서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었는데

서로의 책에  교차 싸인을 해 주는 시간을 가지면 어떻겠냐는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싫다고 손사레를 쳤지만 이미 그는 불려와 있었다.


이게 뭔일인가 싶었다.


책에 대한 이야기는 딱 두 마디만 했다.

그 작가 : 젊은 시절 지는 죄가 많아 속죄하는 마음으로 글을 썼습니다.

나 작가: 지금은 죄 안 지으시나 보다...


주간보호센터 원장님인 경진이, 보습 학원 원장인 귀옥이, LH공사 사원님인 문섭이, 그의 아내 카페 사장 홍여사님,

버스를 몰며 글을 쓰는 허작가님, 순 후루꾸 야매 작가 나님.


우리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중구난방이었지만

다시 만날 일 없을 것 같은 독특한 구성원의 조합은 무알콜의 만남에 충분한 취기를 주었고

더 없이 순수하여 제 맘대로 이 사람 저 사람 불러 모아 낸  부부의 선의는 황당하기보다는 묘한 안심을 주었기에

쉬지 않고 내리는 창 밖의 빗소리조차 의자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구성원 같았다.


살다가, 이런 만남도 있을 수 있구나,

꽃을 밟지 않으려 뒷걸음을 치다가 서로 마주친 눈빛같은 만남의 재미 난 저녁 나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