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ose for Emily

오이가 서른 여섯개

Tigerlily 2018. 5. 28. 15:53



연상이는 나의 목사 친구이다.

문목사님, 이라고 부를 때도 있고

문샘, 이라고 부를 때도 있고

연상친구, 라고 부를 때도 있지만

연상아, 라고 부른 적은 없다.

그럴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오이 서른 여섯개,

엽서 한 장.

그리고 눈 내리던 어느 겨울 밤.


피천득이 수필 <인연>에서 아사코와 함께

하얀 실내화나 노란 우산를 기억해 내듯

내게도 연상이와 함께 떠오르는 삽화들 몇몇이 있다.

어쩌면 나만 기억할지도 모르는.

 


초, 중학교를 같이 다녔고

고등학교 때 같은 교회를 다녔지만

얼굴을 바라보며 얘기를 나눠본 것은

그가 회장을 하고 잠시 내가 부회장을 했던

교회 청년부 시절에 이르렀을 때였던 것 같다.


5236, '오이가 서른 여섯개'

독특한 방법으로 전화번호를 알려준 덕택에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 아마도 그는 잊었을 - 그의 집 전화번호이다.

그의 집 번호를 눌러본 적이 있던가,  기억에 없다.


엽서, 그의 대학 과사무실로 엽서를 한 장 보냈던 것 같다.

누가 들여다봐도 상관없을 내용이었지만,

그리고 그로부터 답장도 없었지만

아무도 없는 신발장에서 아사코의 하얀 실내화를 바라보는 것 같은

초록색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눈내리던 어느 밤.

청년회 활동을 마치고 귀갓 길에 우연히 그가 동행해줬다.

함박눈이 연신 쏟아졌고 우산을 같이 쓰고 많은 얘기를 나눴었다.

얘기가 마쳐지지 않아 우리집과 교회를 반복해서 서너번을 오갔던 것 같다.

그 밤, 그치지 않던 눈발과 바람소리로 늦도록 잠들지 못했던 것 같다.


독립하여 새로이 개척하는 목사님을 따라

나도 그 교회를 떠났고, 그러면서 연상이와도 멀어졌다.

사실, 가까운 적도 없었기에 '멀어졌다'라는 말도 적절하지는 않다.


어영부영 어른이 되어 대충 살고 있는 나와는 달리

그는 소망했던 대로 목사님이 되었고 지금은 강화도의 어느 곳에선가

장애우공동체를 만들어 힘 다해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다.


일 년에 고작 한 두번 문자를 주고 받는

'친구'라는 이름조차 무색한 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게, 숨겨놓고 나만 가고 싶은 소롯길 같은 사람이다.

몰래몰래 자랑하고 싶은 멋진 삶을 사는 친구이다.


어젯밤 그의 꿈을 꿨다.

'연상아, 니 꿈 꿨어'라고 문자를 보내고 싶었지만

그것마저 아껴두고 싶은 것은

두번째까지의 아사코로 그를 곱게 기억하고 싶은 까닭이다.

나도 그처럼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고 싶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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