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gerlily 2017. 9. 18. 13:41

 

 

 

 

명부전 마당을 가득 채운 하얀 연등들처럼

머릿 속에 백촉짜리 전구다마가 환하게 켜지듯

뇌가 명징하게 각성되는

호주에서의 불면의 밤마다

결국 잠을 포기하게 되는 새벽녁에

유일하게 시간을 같이 보낸 준 이는 빨강머리 앤이었다.

 

 

 

호스트 패밀리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이불 속에서 폰으로 유튜브에 접속해서 보는 애니 속의 앤은

그나마 내가

걸어다니는 유령이 아닌

밝은 아침을 기다려도 되는 사.람.임을 확인시켜준 존재였다.

 

 

 

하지만 그 새벽,

앤보다는

 

도무지 공감받지 못하는,

별난, 엄마걱정으로 휘청거리는 나를,

이유없이, 근천스럽게 눈물만 줄줄 흘리는 나를

누군가 꼭 안아준 사람이 있었다.

 

Matthew 아저씨.

 

 

앤의 난감한 질문에 가장 많이 하는 대답은

'글쎄다(Well now, I dunno) 였고

자신이 만든 케잌의 점수를 묻는 앤의 눈동자가 반짝거릴 때

'백 점'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케이크를 조금 더 줄 수 있겠니"라고 대답하던

숫기없는 그가

 

 

난 말이다 앤.
사내아이 열명이 와도 필요없단다.
네가 우리 곁에 있는게 훨씬 좋구나. 진심이란다.
나의 자랑스러운 앤이지, 암.
누가 뭐래도 넌 내 딸이란다.

 

라고 말했을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악마같은 사랑의 히스클리프도

믿음직스러운 이성주의자 알료샤도

더군다나 앤도 아닌

 

바로

매튜 아저씨라는 것을 알았다.

말없이 내 슬픔을 안아줄 수 있을 것 같은

그의 품에서 그 새벽

나는 염치없이 엉엉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