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나의 모교 전북중의 원래 이름은 동산중이다.
'동산촌'이라는 그 동네 이름을 따서 지어진 이름이다.
내가 다니던 시절만 해도 완주군에 속한 전주 외곽 면소재지여서
in Jeonju를 위한 연합고사 합격을 위해 중3 때 이미 야간학습을 했었다.
학급당 연합고사 합격율이 1/3도 채 되지 않았던 촌동네 아이들이었지만
한 학급 학생 수가 60여명이나 되었고 9반까지 있었으니
촌도 아니고 도회지도 아닌 그 경계정도의 수준이었던 것 같다.
도시락을 두개씩 싸들고 다니며 했던 야간학습은
고역이었지만 재미도 있었다.
사춘기의 가장 말랑말랑한 지점에 있었던 나는
저녁 도시락을 까먹은 후 짝꿍에게 수첩에 적어 놓은 시들을 낭송해주기도 했고
교실 창문에 턱을 괴고 '서편에 달이 호수가에 질 때에..'라는 노래를 읊조리기도 하고,
지금 생각하면 손발이 오글거리는 짓거리를 퍽이나 했던 것 같다.
도중에 정전이 된 어느날엔가는
그 당시 좀 까졌던 친구, 정숙이가 앞으로 나와 휘버스의 <그대로 그렇게>를 선창해서
같이 따라불렀던 기억도 난다.
어둠 속에서 감각의 중심은
온통 우리, 아니, 나였던 16살이었다.
떠들다가 옥상으로 불려나가 단체 기합을 받기 일쑤였고
잡초 수북한 곳에 4열 종대로 부동자세로 세워놓고 모기에게 몸을 맡기는
듣도 보도 못한 '모기밥'이라는 인격모독적인 기합도 받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초 가을 무렵 어느 날
야간 학습이 끝나갈 즈음에
교실 스피커로 노래 하나가 흘러나왔다.
당번 감독샘께서 우리를 위해 방송실에서 틀었던 것이다.
단숨에 그 노래는 우리를 압도했다.
마치 척박한 감옥 안에 울려 퍼지던 <쇼생크 탈출>의 '저녁 바람은 부드럽게'처럼.
2절이 나올 즈음에는 누군가 교실의 불을 껐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들 하나 없는데..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진다방 맞은 편 우체국 사거리가 가장 번화가였던 촌구석
촌년 촌놈으로 자라고 있던 우리는 그날 밤,
훌쩍 컸다는 생각도 들었고
이유도 없이, 대상도 없이, 목표도 없이,
가진 것 비록 적어도 깨치고 나가 끝내 이기리라는 다짐을 했던 것 같다.
인생을 괜찮게 살아보고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노래를 엊그제 광화문 촛불의 물결 속에서
빨간 목도리로 추위를 여민 양희은이 다시 불렀다.
열 여섯 초가을 밤의 정체모를 결심이 다시 생각나는 가슴 아픈 밤이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걸 확인하는 안심이 되는 행복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