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아, 제발 안녕
1. 포도씨 아니고, 포도시
포.도.시. 존재하느라 욕 본 여름이었다.
히키코모리가 되어 하고 싶은 것들만 고요히 조곤조곤 하고 싶어서
No 연수, No 여행, No 외출을 계획한 여름방학이었으나
겨우 겨우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토닥거려줄 만했다.
너무 더웠다.
정말 격렬하게 아무 것도 안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여름이었다.
2. 번개같이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이영광의 <사랑의 발명>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당신은 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는다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나의 아주 가까운 친구가 큰 고난을 당했다.
마음에, 공기가 전혀 통하지 않는 두꺼운 가죽 거적을 뒤집어쓰고 있는 그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나의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 뿐이었다.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하고 싶은 여름날이기도하다.
3. 별 말은 아니지만,
"저는 태어났으면 죽는다는 것 외에는 필연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많은 운과 우연들 속에서 만났던 모든 분들께 감사해요"
별 말은 아니지만 나도 같은 생각이다.
많은 우연들이 만나서 만들어내는 에피소드의 조각들이 삶이다.
삶은 계란이 아니라, 우연의 결과물들이라는 생각에 이르는 순간,
개봉안된 영화처럼, 포장이 아직 안 뜯긴 택배처럼
삶은 문구점에서 쪼그리고 앉아 까보던 기대만발 '또뽑기'이다.
친정가족모임으로 갔던 여름 소풍,
지리산계곡 속 평상에 누워 본 한 여름밤의 별잔치는 반짝반짝 잠들기 힘든 밤이었다.
'오늘 행복하면 된다'.
희망의 가지들을 가차없이 쳐내어버리면, 제법 행복이 단순해진다.
또 다른 우연이 아가리를 벌리고 기다리는 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