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걸로 충분하잖아
다시 열두살 때로 돌아가 있었다.
처음으로 유화물감 한 상자와 연습장만 한 팔레트를 가지게 되었던 때였다.
물감이 담긴 튜브들은 먼 나라에서 온 꿈같은 이름을 달고 있었다.
인디언 레드, 나폴리 옐로, 원색 시에나.
그리고 눈보라에 흩날리는 눈송이를 연상시키던 그 신비한 이름의 플레이크 화이트.
기름 냄새는 나를 반세기 전의 약속으로 되돌아가게 했다.
그리고 또 그릴 것, 한평생 매일 그릴 것, 죽을 때까지 다른 것은 말고 그림만 생각할 것이라던.”
시끄러운 맥도널드에 앉아서 친구를 위해서 이 부분을 읽었다.
왜냐하면 그 친구가 바로 “한평생 매일 그릴 것” 같은 화가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나 자신을 위해서도 읽은 셈이었다.
우리는 수단과 목적으로 가득한 세상을 살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많은 것들조차도 자신의 결핍을 메우려고,
기껏해야 자존감이나 경쟁력을 높이려고 수단시하는 우를 범한다.
그렇지만 기름 냄새가 존 버거에게 그림을 파는 걱정에서 벗어나게 해준 이 부분을 읽을 때
나도 덩달아 깨끗한 종이 냄새로 돌아가게 되고 코를 벌름거리게 되고
내가 책읽기를 좋아했던 사람임을 기쁘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원래 너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잖아.
그걸로 충분했잖아. 원래 나는 책 읽는 것을 좋아했잖아.
그걸로 충분하잖아.
우리는 그걸로 뭘 하려는 이유도 없이 그것들을 좋아하기 시작했잖아.
친구는 지금쯤 비행기 안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창 너머로 보이는 별빛과 달빛을,
창 안에 독서등을 켜놓고 책을 읽는 이름 모를 승객을.
이 생각을 하며 나는 또 다시 책장을 펼치는 것이다.
- 한겨레신문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