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ose for Emily

밀지 마요

Tigerlily 2014. 10. 4. 20:30

 

 

 

 

"2005년 가을. 사람들 틈에 끼어 서울의 불빛을 바라봤다.

그리고 노량진의 이름을 생각했다. 다리 량(梁) 자와 나루터 진(津) 자가 동시에 들어간 곳.

1999년 내가 지나가는 곳이라 믿었던 곳. 모든 사람이 지나가는 곳.

 하지만 그곳이 정말 '지나가기만' 하는 곳이었다면 얼마나 좋아쓸까.

7년이 지난 2005년 나는 왜 여전히 지금도 그곳을 '지나가고 있는 중'인 걸까.

짧은 정차 후, 사람들이 물밀듯 들어왔다.

한 여자가 내 발을 밟으며 소리쳤다.

 "밀지 마요!"

우주 먼 곳 아직 이름을 가져본 적 없는 항성 하나가 반짝하고 빛났다.

그리고 어디선가 아득히 '아영아, 내 손 잡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정신을 차린 뒤, 열차가 어디까지 왔는지 따져보았다.

벌써 집 근처에 가까워져 있었다.

차고 깊은 가을 밤. 지하철은 여전히 그리고 묵묵히─ 서울의 북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

                                                                            - 김애란, <자오선을 지나갈 때> 중

 

 

 

 

 

 

 

"초여름 바람을 받아 버드나무 가지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기노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작고 어두운 방 한 칸에서

누군가의 따스한 손이 그의 손을 향해 다가와 포개지려 했다.

기노는 눈을 감은 채 그 살갗의 온기를 생각하고 부드럽고 도도록한 살집을 생각했다.

그것은 그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것이었다.

꽤 오랫동안 그에게서 멀어져 있던 것이었다.

그래. 나는 상처받았다. 그것도 몹시 깊이.

기노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 어둡고 조용한 방안에서.

그동안에도 비는 끊임없이, 싸늘하게 세상을 적셨다."

- 무라카미 하루키, <기노>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