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ee you
하루키가 저물도록 글을 쓰다가,
늦은 저녁 파르스름하게 수염을 깎고
그레이색 후드티를 입고 산책을 나와
동네 고양이들과 놀다가 들르곤 하던
그리스의 한 골목카페에서 마시곤했다는 얼그레이,
지독한 몸살감기를 한 삼일쯤 앓은 후
열이 가신 사뿐한 몸으로
오전 11시의 데워진 햇살이 게으르게 졸고 있는
마루로 나와
티볼리 라디오를 켰을 때, 나오는
낯익은 남자의 노랫소리.
이런 수식들을 내 맘대로 붙여보다보면
갑자기 얼그레이 차를 마시며 그 노래를 듣고 싶어질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진은영시인은
어떤 사물이나 상황에 대해 자신의 언어로 한줄로 정의하는 습관이 있다고 했다.
그래야만 할 것같은 의무감까지 있다고 하니 역시 철학을 전공한 시인답다.
이를테면,
문학이란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처럼.
교무실에 와서 이름을 모른 체로 선생님을 찾는 아이들이 있다.
'어...., 성함은 모르겠고요. 1학년 수학쌤인데요, 젊으세요. '
가끔, 정신이 번쩍 든다.
나를 찾을 때는 문 앞에서 어떻게 묘사할까.
'아, 진짜. 있잖아요. 키는 땅콩만하고요, 발음은 완존 구리고요.
졸라 째만 내는 그 여쌤있잖요. 아, 답답하네. 3학년 영어쌤 말이에요.
맨날 여름에도 부츠만 신고 다니고 이쁜척 개 쩌는 쌤요, 몰라요?'
이렇게 털리는 것도 순식간일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는 뜨끔하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겁이 안난다.
설명되어질 없는 것, 정의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다.
직성이 풀리도록 개운하게 선언되어진 관계가 아닌 것은
에미 맛도, 애비 맛도 아닌 어정쩡함일 수도 있지만
번역의 오지랖을 이빠이 넓혀줄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영화 <아바타>에서 나비족 추장의 딸 네이리티는
사랑하는 남자 제이크에게 사랑한다는 말 대신에
이렇게 말한다. 아무런 수식없이.
"나는 당신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