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들
중학교 1학년 학기 초에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은 학급 아이들에게 좌우명을 적어와서 발표하라고 하셨다.
좌우명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한 우리 촌년들은 여기저기에서 주워온 멋진 말들을 좌우명으로 급조하여 순서대로 발표하였다.
내 차례가 다가오자 나 역시 언니의 자습서인가, 일기장의 아랫단인가에서 본 나름 멋진 말을 발표했다.
'눈물을 위하여 낭비할 시간은 없다, 바리런이요.'
'바리런? 바이런 아녀? 영국 시인?'
'저는 바리런이라고 봤는디요.'
바리런이 되었든 바이런이 되었든, 급조를 했든 세심하게 골랐든
그 시절 나름 내 마음에 꽂힌 말이었던 것 같다.
중학교 1학년의 좌우명치고는 다소 숙연하지만 말이다.
버튼을 누르면 딸깍하는 경쾌한 금속성의 소리를 내며 열리던
여고시절의 내 군청색 책가방의 안쪽 목덜미에는
이름 따위 등을 적어 넣는 투명한 작은 네임 텍 같은 게 붙어있었다.
당시 교련을 가르치시던 우리 담임 선생님은 어느 날 나와 면담을 하시면서
'와, 선히 멋지더라. 햇빛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 대단해!'
우연히 나의 가방의 네임텍 안에 써서 끼워놨던 문구를 보셨던 것이다.
'햇빛처럼'
돌아보면 참 별별 새살을 다 까며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속에나 꽂아놓지 뭘 또 그런 곳에 그런 걸 전시까지...
그래도 '최선을 다하자'나 '내 목표는 인 서울' 따위의 말이 아니었음이 얼마나 다행인가.
가방의 고개가 깔딱 젖혀질 때마다 보였던 그 문구는
마음 속에 여러 개의 방을 마련할 줄 몰라 자주 내리는 비에 속수무책으로 젖기만 했던
그 시절, 자꾸만 펼쳐든 우산이었던 것 같다.
그 문구는 생명이 길어서 지금도 우리 집 현관 입구 흰색 금속판 장식 위에 새겨져 달려있다.
교대를 그만두고 같은 과로 편입해 들어왔던 나이 많은 경숙 언니의 소개로 읽게 된
니코스카찬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 시절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울음' 같았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 작가의 묘비명이라고 알려진 이 문장은
넘쳐나는 유사 해답 속에서 그 어떤 답도 친절하거나 우호적인 내 것으로 보이지 않던 시절,
가장 정답에 가까웠던 위로였다.
아무것도 쓰지 않은 시험지를 가장 먼저 제출하고 앞문을 열고 나가도 될 것 같은
호기로운 정답이었다.
'연둣빛 황홀, 당신 뜨락에 가득하기를'
한 때,
생일 카드 등 의례적 쪽지를 써야 할 경우, 한껏 멋을 낸 나의 단골 멘트는 이것이었다.
낭만에 대하여는 나를 덮어먹을 것이 없을 걸, 이라는 생각으로 여기저기 퍼 주던 이 문장은
어느 날 <소리문화의 전당> 앞에 있는 비빔밥을 파는 식당의 벽에 가득한 낙서 중에서
내 눈에 띄어 입양한 것이었다.
당신 뜨락의 황홀을 기원한다는 후의보다는
내가 꿈꾸는 삶의 미학이 얼마나 건전하게 매혹적인가를
아슬아슬하게 흘리는 단정한 유혹이고 자랑질이었다.
'화무는 십일 원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
그 옛날 우리 엄마와 동네 사람들, 고된 노동 후에 막걸리에 취해
논두렁에서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부르던 그 노래를 샛거리 심부름 나온 나도 따라 부르곤 했었다.
의미도 모르고 부르던 그 노래의 가사를 정확히 알고 났을 때는
얼마나 심오한 인생무상을 이야기한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
열흘 붉은 꽃은 없으며 (花 無十日紅)
연둣빛 황홀은 상당한 값을 치러야만 맛을 볼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되면서
남들보다 내가 나를 함부로 바라보게 되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때 만났던 성경 이사야서 43장에 나오는
'보배롭고 존귀한'이라는 두 개의 형용사는
남들이 나보다 잘나 보이는 날에는 꽃 한 송이를 사서 집에 들어가 아내와 노닌다는 하이쿠처럼
사람과 상황 속에서 한없이 쪼그라들 때 뒹굴뒹굴 놀아줄, 나만 봐라봐주는 낫낫한 각시였다.
전지전능하신 유비쿼터스 우리 하나님이 내게 건네는 무색무취의 짜릿한 고백이었다.
요즘은 그냥
인간은 이상하고 인생은 흥미롭다,
라는 문장에 동의한다.
어설픈 중늙은이의 나이가 되니 이해의 필터는 촘촘해지고 깡깡해져
관대해지기보다는 까칠해지고 관계에 쉬이 지친다.
마음이 넓어지기보다 얇아지니 쉽게 찢어지는 탓이다.
신형철 님의 책 《인생의 역사》에서 훔쳐온 이 문장은
별의별 인간들에 대해, 만만치 찮은 인생에 대해
말랑하게 단추를 몇 개 풀어도 된다고,
'인생의 질문들 앞에서 난, 모른다'라고 대답해도 된다고 말해준다.
격문이 없어도 스스로를 꼿꼿이 세울 수 있는 내적 파워가 있는 사람이 부럽다.
하지만
나부낄 때마다 나를 다독여주었고,
동동거릴 때마다 같이 서성여준 나의 문장들이 있어서 다행스럽다.
그것들이 있어서
살아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임을 가까스로 깨닫게 되었으니
참 고마운 벗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