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엄마에게
신혼 때부터 쓰던 겨자색 전자레인지가 고장이 났다.
새로 구입하려 쿠팡에 검색을 해보니
비싸봤자 15만 원을 넘지 않았다.
막 주문하려는 찰나, 남편이 끼어들었다.
'장모님이 쓰시던 것, 아직 그대로 있잖아.
멀쩡하기도 하고 어머님 손때도 묻어있고 좋잖아.'
비싸지도 않은데 낑낑대며 들고 오는 수고대신
그냥 사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머님 손때 운운하는 데에는 더 이상 반박하기가 뭐 했다.
가계약이 이루어져 매매가 진행 중인 동산촌 집은
아직은 막내오빠가 가끔씩 오며 가며 살핀다고는 하지만
지지부진한 매매의 절차만큼이나
잡풀이 무성하고 동네의 고양이들이 드나드는 폐가가 되어있었다.
구석구석이 패인 시멘트 토방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햇볕에 바래 삼색선이 희미해진 엄마의 분홍색 슬리퍼를 한쪽으로 밀며
신발을 신은 채 마루와 안방을 지나 주방에 가보니
진홍색 전자레인지는 온데간데가 없었다.
하릴없이 열어본 냉장고에는
노란색 고무줄로 입구를 칭칭 감아놓은 참기름병과
오래전 내가 사다 날랐을 초코파이와 카스타드 몇 개가 뒹굴고 있었다.
개수대 위 녹슨 선반 위에 얌전히 엎어놓은 낯익은 머그컵을 볼 때까지는
가까스로 참았던 눈물이
마루에 걸린 큰 거울을 본 순간 와락 터지고 말았다.
큰 거울 한쪽에 여전히 붙어있는 빛바랜 나의 사진.
십여 년 전,
근무하는 학교에서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타블로이드 신문을
발간하며 축시를 나에게 의뢰한 적이 있었다.
엄마께 내 시가 실린 그 신문을 드린 적이 있었는데
어느 날 가보니
마루에 걸린 거울 한 구석에 신문에 같이 게재된 나의 얼굴 사진을 동그랗게 오려서
붙여놓으셨던 것이다.
"우리 막내딸 이쁜 얼굴 내가 날마다 볼라고 붙여놨어."
엉엉 우는 나를 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남편에게 소리 질렀다.
"전자레인지 몇 푼이나 된다고.
내가 그냥 사자고 했잖아.
나는 아직 너무 힘들다고.
엄마집 오는 게 너무 힘들다고."
어젯밤 재형이 부부가 난초 화분을 사가지고 왔다.
어버이날 선물이랍시고 들고 와서 남기고 간 불경기의 사업 걱정의 무게로
나는 자다가 깨고 자다고 깨고를 반복했다.
살아계시다면 울 엄마,
그 옛날 어린 우리 두 아들에게 하시던 말씀
또 하셨을 것이다.
"이눔의 새깽이들,
째깐한 몸댕이로 동동거리고 댕기는 니네 옴마,
엥간히 힘들게 혀.
우리 딸이여.
우리 막내딸 힘들게 하먼 내가 가만 안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