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이상하고 인생은 흥미롭다
마음이 불편하여 토론 프로그램을 잘 보지 못한다.
상대의 의견은 한 치도 수용하지 않으면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듯
오로지 철저하게 자신의 생각과 의견만을 뱉어놓는 패널들을 볼라치면
옆을 보지 못하도록 하는 가림막을 착용하고 달리는 경주마를 보는 것 같다.
두 진영으로 나뉘어 거의 원수를 대하듯 하고 있는 요즘 시국에서의
티브이 정치토론을 보고 있으려면 나도 모르게
"학~씨!"가 연발된다.
그래서 요즘은 티브이 자체를 잘 안 본다.
그러던 중 얼마 전 토론프로그램에서 최고의 승리 전법을 발견하게 되었다.
말도 안되는 괘변을 늘어놓는 상대 패널에게 유시민 씨가 웃으면서 한 마디 했다.
"그러면 계속 그렇게 생각하시고요."
아무리 그럴듯한 논리와 설득력있는 근거를 내세워도 도통 귀 기울이지 않는 상대에게
이보다 더한 역공은 없었다.
상대가 온 힘을 실어 던지는 펀치에 펀치로 맞서는 대신
유연하게 몸을 피함으로써 슬립다운을 얻어내어 KO승을 거두는 전법이었다.
가성비 최고의 공격아닌가. 통쾌했다.
사실,
그러면 계속 그렇게 생각하시고요, 전법은
토론에서는 토론의 깜이 되지 않는 상대에게 사용하는
'김빼기'라는 최후의 공격의 한 전략임에 틀림없지만
좀 더 유연하고 따듯하게 적용시켜 본다면
나와 다른 당신을 나의 식으로 뒤흔들지 않겠다는 자세이다.
수용까지는 아니어도
뭐든 일어날 수 있는 세상에서 그 '뭐든'의 하나로 바라보겠다는 것이다.
한 번 더 굴려
내가 좋아하는 평론가 신형철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원래부터 인간은 이상하고 인생은 흥미롭다, 는 것이다.
독서나 영화가 주는 맛과 힘도 비슷하다.
99명의 사람이 오른쪽으로 갈 때
왼쪽으로 가는 한 사람의 마음 세계를 궁금해하는 것이
문학의 출발점이라는 말이 있다.
책이나 영화 속의 다양한 별의 별 군상들의 인간을 접하면서
삶의 개연성의 스펙트럼을 넓혀갈 수 있다.
뭐든 일어날 수 있는 세상이고, 별의별 인간이 다 있는 세상이니
너무 놀라지 말라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라는 스스로 만든 울타리에
자꾸 개구멍들을 뚫음으로써
사유의 빛깔은 다채로워지고 생 위에 훨씬 더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시선을 얹게 된다.
얼마 전에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었다.
쉽지 않은 독서였다.
7대에 걸친 부엔디아 가문의 이야기에는 비슷비슷하고도 반복되는 이름이 너무 많았고
스토리도 워낙 복잡 방대하여 앞에 붙어있는 가계도를 수시로 들여다봐야만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환상과 현실이 혼재해 있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마르께스의 장르는 적응이 쉽지 않았다.
집시가 들고 온 양탄자를 타고 하늘을 누비는 마콘도의 주민들,
상대의 꿈 속으로 들어가 꿈속의 인물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밤나무에 묶인 채 평생을 보내는 부엔디아,
분명히 죽었는데 몇 년 후 다시 살아나는 멜키아데스,
하늘로 승천하는 레메디오스...
하지만 이내 그런 환타지가 이상하지 않았다.
이미 현실에서 경험될 수도 있는 일처럼 친숙하게 되었다.
최고의 이야기꾼의 재주에 홀려
때로 반 페이지를 넘어갈 정도의 긴 문장이 주는 가뿐 호흡도,
역사와 환상의 모호한 경계가 주는 혼란도
'인생은 흥미로운 것'이라는 진실을 뒷받침해주는 좋은 근거가 될 뿐이었다.
책 속에서 서너 번 반복해서 나오는 표현대로
'아버지를 따라 집시가 가져 온 얼음을 처음 구경하러 갔을 때의 설렘'으로,
혹은
'이봐요, 아가씨,
삶은 주머니로 가득한 옷 같지 않소?'라는 호기심으로
내 앞에 펼쳐지는 현상들을 받아들이면 될 뿐이다.
간혹
얼음은 너무 쉽게 녹아, 흔적조차 남기지 않기도 하고
그 많은 주머니 속에서는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비암이 발견되기도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