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쓸쓸하기 그지없고
동산촌 집이 팔렸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일 년이 되었고
돌아가시기 이 년 전부터 막내 오빠 집에서 같이 사셨으니
3년 정도 빈 집으로 있게 되어 거의 폐가가 되었었다.
장례를 치른 후 남아 있는 엄마의 살림살이를 정리하기 위해
우리 형제자매가 엄마집에 모두 모인 후로 나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간간이 막내 오빠가 들러서 마당의 풀도 정리하고
무성하게 자라나 지붕 쪽으로 기울어진 대나무 가지도 쳐냈다고만 들었을 뿐
고향 동네를 지나갈 일은 많았지만 들러보지는 않았다.
여전히 토방 위에 놓여있는 엄마의 색 바랜 분홍색 슬리퍼나
엄마의 손길이 남아있는 몇 가지 살림살이를 담담하게 볼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네의 절반이 새로 지은 아파트 부지로 편입이 된 까닭에
독립된 동네로서의 고향집의 정감 있는 모습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
우리 집을 포함한 나머지 가옥들도 이미 지어진 아파트 회사에서 매입하기 위해
몇 번 매매를 타진해 왔다는 소식도 있었던 까닭에
형제 중 누군가가 새로 단장하여 산다든지 등등의
고향집을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고려하지는 않았었다.
오히려 폐가로 계속 방치하느니 빨리 처분하여 각각의 형제들의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실질적인 바램이 더 컸었다.
그러면서도
엊그제 매매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는 가족 단톡방에서의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에 구멍이 난 느낌이었다.
돌아갈 길을 잃어버린 여행자가 된 것 같았다.
여전히 나의 꿈속에 자주 출몰하는 탱자나무 골목길,
-된장을 푼 다슬기가 거의 익을 무렵이면 가시를 끊어 오기 위해 쏜살같이 달려 나가곤 했던
탱자나무 골목길-
그만 들어가라고 손사래를 쳐도 나를 배웅하기 위해 엄마가 지그시 밀던
해 질 녘의 하늘색 대문,
사철 발 벗은 바쁜 엄마가 잊지 않고 가꾸어 흐드러지던 화단의 온갖 꽃들,
거나하게 취한 얼굴로 소를 몰고 들어오시던 우리 아부지의 풀어진 눈동자,
미닫이 문을 열면 쌀알처럼 부서져 들어오던 한겨울 밤중의 고요한 찬 공기,
이른 아침, 쌓인 눈을 쓸던 엄마의 빗질소리,
아버지가 끓이던 소여물냄새와 '고설따라'(곳에 따라) 비가 내린다는 김동완 통보관의
일기예보가 부엌에 가득 차던 새벽의 라디오 소리,
한 밤중 엄마를 깨워 대문 옆 변소에 갈 때면 온 마당을 가득 채우던 무더기 무더기 분꽃향기,
토방에서 손을 벌리는 형제들의 등굣길, 앞 집 옆 집으로 돈을 빌리러 달리던 엄마의 담박질...
어느 집이나 그렇듯,
윗 모퉁이 멍석 사이, 대나무 숲 속, 예측할 수 없이 까놓던 어미닭의 달걀처럼
낱낱이 이름 붙일 수 없는 고난과 슬픔, 기쁨과 환희는 순서를 달리하며
우리 동산촌 집 식구들에게 불쑥불쑥 찾아왔다 물러가기를 반복했다.
그럼에도 그러한 삶의 공격 속에서도 가족이라는 원심력을 잃지 않고
과꽃처럼 고만고만하게 순하고 다정한 어른으로 늙어가고 있는 것은
나의 동산촌 고향집이 우리를 길러내어 준 힘 덕분일 것이다.
다정한 적 드물었지만 그 무심함이 원망스럽지 않았던
지독하게 선한 성품의 사철 거나했던 아부지와
그 작은 몸뚱아리로 우리의 온 우주를 가득 채우고도 남았던 우리 엄마,
그리고 할머니, 고모들...
이제는 모두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분들의 시간이 우리들의 계절로 이어져
'선한 사람들이 살던 나의 옛 고향집'으로 남게 되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계절은
전망 좋은 21층의 48평 지금의 아파트가 아니라
아홉 식구가 매캐한 모깃불 옆 평상에서 김치 한 가지 놓고 칼국수를 먹던 그 시절 동산촌의 그 계절이다.
내 존재의 힘이었고
내 삶의 버팀목이었던
다정한 것들이 자꾸만 사라져 가고 있다.
엄마도 이제 이 세상에 안 계시고
돌아가 내 영혼이 쉴 동산촌의 고향집도 없어졌다.
삶은 쓸쓸하기 그지없고
우리는 견뎌내야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