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ose for Emily

내가 누구인지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Tigerlily 2024. 11. 21. 10:33

 

 

'너와 함께 있을 때 내가 가장 나다워지는 것 같아.'

내가 들은 최고의 찬사다.

 

자기다움을 맘껏 펼칠 수 있을 만큼 내가 그에게 만만하다는 말인지

본인만의 고유성이 압박없이 펼쳐질 만큼 그를 대하는 나의 마음의

흡수력과 반발력의 균형이 적절하다는 말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그 말을 할 때 듣는 나나 말하는 그나 고요하고 아늑했음은 틀림없다.

 

나는 누구인가?

 

모노산달로스(외짝신의 사나이)의 이아손이나

아버지에게서 신표로 가죽신을 받은 테세우스나

숨겨져 있던 정체성이 가져온 비극으로 인해 결국 눈이 먼 채

세상을 유리하는 최후를 맞이하는 오이디푸스,

이들 신화 속 인물들의 이야기 역시 

'나는 누구인가?'의 답을 찾아가는 일종의 로드무비이다. 

 

엊그제 《글래디에이터 2》를 봤다.

전편을 뛰어넘을 수 있는 속편은 없다고들 하지만 볼 만했다.

전편보다 스펙터클함은 강해졌고 플롯의 짜임이나 흐름도 만만치 않았다.

다만 전편의 주인공 막시무스의 슬픔의 서사를 뛰어넘기가 쉽지는 않았다는 평이 맞는 듯했다.

그럼에도 스토리의 전개가 탄탄하고 캐릭터 설정에 개연성이 충분하여 몰입시키는 영화적 힘이 있었다.

감독 리들리 스콧에게 "원작에 부응한 후속 편을 만듦으로써 희귀한 업적을 달성했다."는

찬사가 아깝지 않았던 결정적인 근거는 볼거리 풍성한 액션 장면 못지않게

주인공 루시우스의 출생과 관련된 설정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루실라가  루시우스에게  '네가 누구인가'를 설명하는 길지 않은 장면은

어떤 화려한 액션 장면보다도 영화의 무게감을 더해 주었고

검투사 루시우스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실마리가 된다. 

 

전편의 명장명 중 단연 압권으로 꼽히는 장면 역시

관객으로 가득 찬 원형 경기장 콜롯시움에서 자신의 원수의 목전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장면이다.

전쟁에서의 승리를 이끈 용맹성과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신임을 바탕으로

로마의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을 찰나에 정적에 의해 몰락하게 된 막시무스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고향까지 다 잃게 되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검투사가 된다.

죽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한 치 앞도 생명이 보장되지 않는 그가

살아남아서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의 이름은 막시무스 데시무스 메리디우스.

북방 군대의 사령관이자 펠릭스 레거스 장군,

진정한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충직한 신하.

살해당한 아들의 아버지이자, 살해당한 아내의 남편이다.

나는 이번 생에서든 다음 생에서든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Who is it that can tell me who I am?)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어왕》에 나오는 리어왕의 이 유명한 대사는

결국 자신을 파국으로 몰고 간 질문이 된다.

그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대답을 하는 딸에게 국가의 영토를 나눠주고자

세 딸들에게 이 질문을 한다.

큰 딸과 둘째 딸은 온갖 미사여구를 사용하여 아버지를 추앙한다.

하지만 가장 사랑하고 기대했던 막내딸 코델리아는 

직언을 함으로써 리어왕을 격노시켜 내침을 당하고

영토는 두 언니에게 돌아간다.

결국 두 딸로부터 멸시와 버림을 당한 뒤

황막한 광양의 어둠 속에서 그는 절규하며 동일한 질문을 던지고

이에 광대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당신의 그림자.

(Lear's shadow.)

 

모든 것을 잃고 오직 한 인간으로만 남았을 때의 그 존재,

그것의 그림자만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는 말이다.

 

자주 끄집어내어 스스로에게 하는 흔하고 편한 질문도 아니고

명확한 정답이 있는 문제도 아니다.

 

다만 

한없이 삶이 허술해 보일 때, 

상황의 물결에 휩쓸려 정신이 사나울 때,

위선과 치장으로 인해 겉피가 내 안의 나를 짓누를 때,

가끔씩 발걸음을 멈추고 

눈빛이 흔들리고 있는 나 자신에게 묻고 싶어진다.

 

나는 누구인가?

 

질문만으로도 조금은 나를 회복하는 기분이 든다.

 

리어왕의 광대의 말처럼

답을 아는 자는 오롯이 나의 그림자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