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ose for Emily

권태로운 즐거움

Tigerlily 2024. 11. 16. 20:26

 

 

술 덜 깬 아침 한나절

약속 어긴 것 화 안 내고

혼자서 지리산 둘레길 산행 나가는

낡은 아내 미웁지 않다

 

혼자 돌아가는 음악

무슨 뜻인지 몰라 소프라노

낯선 나라 말 그냥 악기소리처럼 싫지 않다

 

너무 많은 나에게 내가 지쳐

전화 한 통 없는 이 쓸쓸함이 좀 오래 갔으면 좋겠다

 

마당귀엔 산에서 옮겨 심은 용담

꽃잎 벌리는 의뭉스런 햇살 손길

내 몸이 간지럽다

 

벌 한 마리 꽃 우물에 빠져 맴돌고

가만가만 진저리 쳐대는 꽃

저들의 한바탕 음화 같은 풍경에

때 아닌 내 거시기가 선다

 

무리에서 쳐져서 산다는 부끄럼 말고도

쳐진 자만이 아는 권태로운 즐거움도 있어

아주 먼, 여자를 떠올리며 수음을 했다

 

이 좀스런 외도가 그리 죄스럽지 않은

마흔 아홉 늦은 가을

-복효근, <늦가을>

 

 

 

 

 

무리에서 쳐져서 산다는 부끄럼뿐만 아니라

쳐진 자만이 아는 권태로운 즐거움도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 듣는

좋은 사람이 내 곁에 있어서 

쓸쓸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