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언니
언니가 아프다.
아이들을 인솔하고 야외활동을 갔다가 전화로 듣게 된 언니의 소식에 정신이 나간 나는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자꾸만 아이들의 숫자를 세지 못해 한 명을 견학지에 놓고 버스를 출발케 했다.
올여름 열대야의 밤들 속에서 '우리 언니가 암에 걸렸다.'라는 문장은
번개처럼 번쩍번쩍 머릿속에 수시로 출몰하여
뇌 속에 오백 와트 백열등을 켠 것처럼 영육이 각성되어 잠이 화다닥 화다닥 달아나곤 했었다.
58년 개띠 우리 언니는 우리 집 여섯 남매 중에서 유일한 나의 여자형제이다.
어영부영 공부를 잘했던 나와는 달리 언니는 확실하게 공부를 잘했고 명석했다.
작은 방 장롱 문고리에 걸려있던 '마로니에 의상실' 비닐이 덮여있던 전주여고 새 교복이
지금도 내 기억에 선명하다.
하지만 언니는 전주여고를 졸업하지 못했다.
근동의 서너 개의 국민학교 출신이 다 모였던 동산중에서 한 해 한 두 명 겨우 입학했던 명문 전주여고를
전체 3등의 석차로 합격했지만 3년 장학생이라는 제안에 결국 동산중 옆에 있던 동산종합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짐자전거를 가래로 타고 가서 야간자율학습을 위한 언니의 저녁 도시락을 건네주기 위해서
뒤꿈치를 들고 들어가 문 앞에서 기다리던 긴 복도의 다정한 고요가 지금도 따스하다.
어쩌다 끝종에 맞춰 도착했을 때는 양갈래로 머리를 묶은 덩치 큰 언니의 친구들이 국민학교 6학년 어린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뻐해 줬던 기억이 생생하다
라디오로 대입합격자를 발표하던 그 시절,
작은 트랜지스터 라디오 앞에 숨을 죽이고 언니와 나는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긴장한 탓인지 결정적인 싯점에 나에게 잘 들어놓으라는 무거운 미션을 주고서
언니는 화장실을 가야겠다고 했다.
나 역시 너무 긴장한 나머지 일만삼천오백이십구 어쩌고 하는 난수표 같은 번호를 놓치고 말았다.
'잘 좀 들어놓으라니까.'
내가 기억하는 언니의 유일한 씅질부림이었다.
울퉁불퉁 때로 정제되지 않은 감정의 찌꺼기를 날 것으로 드러내며
평생 막내티를 흘리고 사는 나와는 달리 언니는 진중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다.
아름다운 성품과 품격, 명석한 두뇌를 겨우 시골의 공무원 생활에 소진하며
첫사랑과 헤어지기도 했고 나의 학비를 책임져 주기도 했다.
내가 언니의 책꽂이에서 빼어 읽던 손바닥만 한 삼중당 문고 속
네흘류도프나 라스콜리니코프, 테스나 라라를 통해
답 없는 땅으로부터 잠시 발을 뗄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사이,
언니는 장점이라고는 착한 것 밖에 없는 한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이제 할머니가 된 언니는 타샤 할머니처럼 살고 있다.
지리산 자락에 넓은 정원을 이루어 철철이 온갖 꽃을 피워내며
별 볼 일 없는 재료로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상을 차려내는 아낙처럼 든든하게
하지만 맨날 따고도 셈에 밝지 못해 맨날 뒤로 밑지는 초보 투전꾼처럼 듬성듬성하게
후하지 않은 운명에 후진 불평 따위 하나 흘리지 않으며 아름답게 살고 있다.
"이만큼 살았으면 됐지, 뭐."
발병소식을 우회적으로 들은 내가 전화를 걸었을 때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너털웃음으로 무거움을 눙쳤다.
"하나님, 나의 남은 생명의 기한이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남은 내 기한의 절반을 떼어 언니에게 붙여주세요."
내가 믿는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했다.
10년 후에도 언니의 텃밭에서 뽑은 배추로
왁자지껄 떠들며 같이 김장을 하고 싶다.
언니를 통해 삶에 별 빛을 섞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엄마가 없는 세상에 언니는 나의 엄마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