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ose for Emily

또 다른 행성

Tigerlily 2024. 8. 20. 13:32

 

1. 말도 못 하게

 

꿈속에서 나는 가끔 남자들의 애절한 사랑을 받곤 한다.

어떤 남자가 나를 겁나게, 말도 못 하게 좋아한다는 것이다.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상대로부터 받는 일방적인 사랑의 느낌은 기가 막히도록 아늑하고 행복하다.

방금 떨어진 꽃잎으로 주변이 온통 꽃물이 든 나무 그늘처럼

몽글몽글하면서도 세밀한 행복감은 잠이 깬 후의 베개에까지 묻어있다.

그래서 나는 꿈의 형상을 보존하기 위해 한참을 그대로 누워 꿈의 울타리 주변을 다시 서성인다.

혹시나 후속편의 꿈으로 이어질까 하는 소망을 품고...

'다시 와주면 안 될까?'

 

 

그런 날은 종일 기분이 달곰 달곰하다.

'니들이 사랑받는 여자의 기분을 알아?'

달큼한 꿈속 로맨스의 여운에 젖어 사랑받는 여인(beloved woman)의 눈빛,

-아마도 다소 고요한 도도함 속에 가장자리에 연분홍 레이스가 달린 눈빛-을 지그시 지어본다거나

꿈이 예지 했던 내용이 현실 속 어떤 모양으로라도 실현될까 하여 조용히 그러나 은밀하게 두리번거려 보기도 한다.

'어디 없나? 그놈 어디, 어디 없나?'

여하튼, 그런 날 나는 한없이 사랑스러운 여자가 된다.

 

 

해소되지 못한 리비도(성적 욕망)의 반영일까,

내 의식의 저 깊숙한 저변에 납작 엎드려있는 발랑 까진 욕망이 뒤꿈치의 힘을 밀어내고 고개를 드는 것일까.

뻔한 세상에서 결코 뻔하지 않은 예측불가성과 난데없음을 장착한 꿈의 특질로 인해

나에게 꿈은 한 편의 단편소설이 되기도 한다.

때로 요망성과 망측스러움까지 장착하여 할리퀸 소설이 되기도 하지만.

 

 

다소 철없고 푼수 같은 속성 때문인지

남들이 흔히 말하는 '가위에 눌렸다'든지 '악몽에 시달렸다'든 지의 경험이 거의 없다.

대신 대체로 나의 꿈의 온도는 아늑하고 따스하다.

나이가 들면서 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예전만큼 수월하지가 않아서 잠을 자야 하는 밤이 달갑지 않게 되었지만

이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은 위로가 된다.

 

나에게는 또 하나의 행성, 꿈나라가 있다.

오늘 밤 또 누가 나를 말도 못 하게 좋아한다고 할지...

 

2. 삼오슈퍼

 

삼호슈퍼라고 전화가 왔다.

곧 가게 문을 닫을 예정이니 어서 와서 포인트 점수를 사용하라는 나이 든 아저씨의 목소리였다.

스팸 전화처럼 귀찮아하며 알았다고 하고 일단 끊긴 했으나

얼마 되지도 않을 포인트 점수의 소멸에 대해 고지를 해주는 성의나 소박한 말투가 잔영으로 남았었다.

그리고 지나쳤는데 하루쯤 지나 문자가 또 왔다.

'안녕하세요 삼오슈퍼입니다. 업종변경으로 가게문을 닫을 예정이니 8월 4일까지 오셔서 포인트 점수를 사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삼호슈퍼가 아니라 삼오슈퍼였다.

이전 살던 아파트가 삼호아파트였기에 아파트로 들어가는 한길 가에 있었던 슈퍼에서 온 전화인가 보다, 정도로만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기억이 났다.

삼오슈퍼는 친정동네 실리에 있는 슈퍼 이름이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 엄마집에 들를 때마다 엄마의 간식거리며 생활용품을 사던 작은 구멍가게이다.

연세 지긋한 노부부께서 운영하셨는데 특히나 작달막한 키의 할아버지는

내가 갈 때마다 더 이상 일상생활이 불가능하여 슈퍼출입이 없던 우리 엄마의 안부를 물으시곤 했었다.

큰 수박을 살 때면 차에 까지 들어다 주시고 황도가 나오는 계절에는

'이게 더 달아요.' 하며 흠집이 난 몇 알을 덤으로 주시곤 했었다.

 

마지막으로 간 게 아마도 3년 전쯤인 것 같다.

그 포인트를 사용하러 삼오슈퍼를 찾아갈 리는 없지만,

쌓인 포인트가 얼마나 될까만,

엄마의 호흡으로 부풀린 풍선의 바람을 빼는 듯

마음 한쪽이 저렸다.

 

나 어린 시절,

우리 엄마도 가끔 잠들기 전에 

그리 슬프지는 않게

그러나 그렇게 기쁘지도 않게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었다.

 

"아이고, 꿈나라나 가야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