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ose for Emily

사슴벌레식 문답

Tigerlily 2024. 4. 8. 16:21

 

 

...

그리고 그 여행을 생각하면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정원에게 전해 들은 사슴벌레 이야기가 떠오른다.

강촌 마을 숙소에 도착해 커다란 방에 짐을 들여놓고 정원과 내가 뒷마당에서 강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정원이 숙소 방을 비질하다 커다란 벌레를 발견한 얘기를 했다. 처음에 휴지로 감싸서 밖에 내놓으려 했으나 벌레가 너무 크고 우람해서 휴지로 감싸기가 두려워 빗자루로 살살 밀어서 밖으로 쓸어냈다고 했다. 그런데 빗자루에 닿을 때마다 벌레가, 하고 말하는데 숙소 주인 여자가 지나가다 듣고 깜짝 놀라 물었다.

 방에 벌레가 많아? 약을 쳤는데.

많진 않고요. 무지하게 큰 벌레 한 마리가 있더라고요.

정원이 벌레의 크기와 생김새를 설명하자 주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음, 사슴벌레네. 그럴 땐 비닐봉다리 있지? 봉다리에 쌀쌀 기어 들어오게 유인해서 바깥에 떨궈주면 돼.

아, 그런 방법이 있었네요. 그런데 방충망도 있는데 도대체 그렇게 커다란 사슴벌레가 어디로 들어오는 거예요?

정원의 질문에 주인이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이내 득도한 듯 인자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디로든 들어와

그리고 가버렸다. 사슴벌레를 대변하는 듯한 그 말에 나는 실로 감탄했다. 너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의젓한 말투가 들리는 듯했다. 마치 가부좌라도 튼 듯한 점잖은 자세로. 

그런데 나의 상상과 달리 정원의 말에 따르면 방에 있던 사슴벌레는 몸이 뒤집힌 채 계속 버둥거리며 빠른 속도로 움직여 다녔다고 한다.

-권여선, <사슴벌레식 문답>, 문학동네, 20쪽, 2023-

 

 

몇 년 전 시청률이 무척 높았던 <지붕뚫고 하이킥>이라는 시트콤의 충격적인 엔딩이 화제가 되었었다.

저녁 식사 시간대 가족들이 가볍게 웃고 떠들며 볼 수 있는 가벼운 분위기의 시트콤에서

교통사고로 인해 주요 캐릭터 서너 명이 한꺼번에 죽는 것으로 엔딩을 설정한 것에 대한 시청자들의 불만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었다. 

해외로 이민을 떠나는 자신을 짝사랑 상대였던 최다니엘이 공항까지 바래다 주는 장면에서 그동안 애타게 좋아했던 사람의 따스한 마음을 처음으로 표현받은 신세경이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라고 독백을 한다.

그리고 그 독백은 바로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당시에는 나 역시 PD의 정신세계가 여간 독특한게 아니네, 하며 여타 시청자들처럼 짜증을 냈었다.

 

 

엊그제, 늦은 봄저녁 적당히 피곤해진 나른한 몸으로 혼자 운전을 하고 가다가 신호등에 걸렸는데

난생처음 문득,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크게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을 박제하고 싶을 만큼 지극히 행복한 시간이었기 때문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현실을 도피하고 싶을 만큼 견뎌내기 힘든 괴로운 시간이어서도 아니었다.

육체적 나른함이 마음의 나르시시즘으로 이어져서 쥐었던 삶에 대한 의욕의 주먹이 스르르 풀려서였을까.

'이대로 생이 끝난들 어떠랴.'

 

 

기승전결이 있는 줄 알았다.

시간과 세월이 쌓임에 따라 삶의 내용이나 방식이 성숙되고 나이테와도 같은 또렷한 변화의 흔적이 나오는 줄 알았다. 별반 달라지는 게 없다, 진즉 눈치는 챘지만. 

 

어제처럼 정처없고,

작년과 마찬가지로 섭섭하고,

비슷한 이유로 서성이고,

별반 다르지 않은 방법으로 어찌어찌 해결되고...

 

마치 폼페이 유적 속의 화석화된 인간들처럼 빨래를 하다가, 밭을 매다가 그 모양 그대로 덜컥 죽음을 맞이할 것 같다.  유튜브로 연예인의 이혼 뒷얘기를 뒤적거리다가, 쿠팡에 귀후비개를 주문하다가 , 남의 카톡 프사나 구경하다가 어영부영 그대로 생이 끝날 것 같다.

 

 

그러다가

권여선의 단편 속, 사슴벌레식의 문답이 생각 났다.

 

어떻게 들어오는 거예요?

어디로든 들어와

 

사슴벌레의 틈입처럼 아무리 단단한 방도를 마련해도 어떻게든 우리는 운명에 의해 수시로 공격을 당한다.

하지만 득도한 듯한 숙소 주인의 사슴벌레식 의젓한 말투처럼

심리적 방어선을 넘나드는 힘겨운 일들도 시간이 마련해 준 틈새 덕분에 '어떻게든 극복이 되고'

회복하기 어려운 어긋난 관계가 주는 불편함도 평화로운 체념이 되었든, 미봉책의 봉합이 되었든

'어떻게든 지내게 된다.' 

 

 

그리하여,

해결하지 않아도, 해결되지 못해도 

마무리하지 못해도, 

결론에 도달하지 못해도

전결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기승에서 멈춘다 해도, 

어찌 되었든,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개개의 구체적 삶이 된다. 

 

꽉꽉 채우지 않은들 어떠하랴,

채우지 못한 채로 삶이 그만 멈춰도 괜찮을 듯싶다는 생각이 드는 봄밤이었다.

아주 잠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