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ose for Emily

유연하게, 유쾌하게

Tigerlily 2022. 9. 15. 14:13

 

 

여기서 결정적인 기준은 '진실'이다.

한 담론이 다른 담론을 억제하고 배제하는 수단은 다름 아닌 '진실'이다.

진실이라는 말 앞에서 사람들은 꼼짝 못 하고 승복해 왔다. 그러나 진실은 과연 진실일까?

한 사회의 지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결정하면 그것이 바로 진실이 되는 게 아닐까?

그러므로 담론의 생산자들은 서로 진실의 고지를 장악하려 격렬한 싸움을 벌인다.

1950년 6월 북한군이 남쪽으로 밀고 내려왔다는 경험적 인식을 진실로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 다른 진영의 담론 생산자들은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전쟁을 일으키고 싶게 만든 반대편 세력에게 전쟁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 진정한 진실이라고 말한다. 

그 후 우리는 5. 18의 진실, 세월호의 진실 같은 수많은 논쟁적 진실들 중 어느 하나의 진실이 헤게모니를 차지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독재'와 '정통성 없음'이라는 프레임으로 이승만 박정희 등 건국 대통령과 산업화 대통령의 존재를 완전히 지우는 것도 지켜보았다. 좌파와 우파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윤석열의 사무실 이전 이슈에서 보듯 우파 내의 다수가 같은 진영의 소수를 가혹하게 입막음하는 행태도 지켜보았다.

-000 《시선은 00이다》, 기0랑

 

 

 

재미 삼아서 시작한 그림 그리기가 벌써 몇 년이 되었다.

'저는 확실히 재능이 없나 봐요.'라는 말을 할 때마다 딸 뻘 나이의 시오 선생님은

'선생님처럼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시는 분도 드물어요.'라는 말로 위로를 하지만

발설하지 않은 ( ) 안의 지문을 내가 모를 리 없다. 

(재능이 없는 게 사실이긴 하지만 그나마 위로를 드리자면)

 

팔레트에 짜서 굳힌 물감은 그 오랜 세월에도 여전히 리필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마디게 닳지만

상대적으로 두세 번 더 리필을 한 색의 칸이 있다.

쉡그린과 울트라 마린!

내가 즐겨 그린 그림의 피사체가 주로 나무를 비롯한 푸른 숲의 정경인 까닭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내가 좋아하는 색이기 때문이다. 색채의 편식이다.

어디 색뿐이랴.

비싼 뷔페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 때에도 플레이트를 바꾸는 두세 번의 순례에서도

그 많은 종류의 음식 중에서 결국은 처음 담았던 음식의 리필이 되는 경우가 많다.

참 재미없다.

그 많은 선택의 기회와 다양성의 숲에서 한 놈만 패는 이 단조로움이라니.

 

지난달, 책모임의 책, 《시선은 00이다》는 내가 선정한 책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삶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권력의 형태와 작용에 대한 내용으로

충분히 '도끼'의 역할-A book must be the axe for the frozen sea inside us-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추천자로서의 안목을 자랑스러워하며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그런데

밑줄을 그어가며 몰입하여 읽다가, 수 없이 발견되는 어처구니없는 띄어쓰기 오류에 발부리가 걸렸다.

명사와 조사를 띄어놓는 오류라니, 책에 대한 신뢰가 확 떨어져서 급기야 어떤 놈의 출판사인가 검색을 해 봤다.

'기0랑'

연관검색어에 조갑제가 나왔다. 

아, 이게 뭐지?

한참을 읽어 내려가다 보니 우려가 사실로 드러나는 구절들을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5. 18의 진실, 세월호의 진실 같은 수많은 논쟁적 진실들 중 어느 하나의 진실이 헤게모니를 차지해 가는 과정...'

알지 못하는 사이 권력이 스며들듯 저자의 사상이 스멀스멀 드러나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 경도된 저자의 사상이 유려한 필력의 등에 올라타 나를 세뇌시킬까봐

이단 종파의 짜라시(파수대, 깨어라 등등)를 내치듯 화들짝 급히 책을 덮었다.

 

책모임 회원들에게 급히 문자를 보냈다. 이번 달 책 선정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죄송하다고.

이런 책도 읽어보고 저런 책도 읽어보는 게 책모임의 의미죠, 

우리가 그렇게 만만한 독서가인가요 괜찮아요,

폭넓게 읽어보게요,

나보다 훨씬 속 깊은 회원들의 댓글이 위로가 되었지만 내내 찜찜했다.

 

책의 역할이 나의 생각과 고집을 강화시켜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와 같은 역할에 있다는 의미에서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글에 대한 접근은 분명히 필요한 것일 게다.

아흔아홉 명이 동쪽으로 갈 때 서쪽을 택한 한 사람의 생각에 호기심을 갖는 것이

문학이라는 누군가의 설명도 있지 않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탈 털어내고 뒤돌아서는 나 자신의 모습에서 내가 그렇게도 경계하는

'얄팍한 지식을 재료 삼아 고집스럽게 쌓아놓은 자기 세계에 갇힌 늙은 고집불통의 추한 여자'의 모습이

아른거려서 더운 한숨이 나왔다.

 

유쾌하고도 유연하게 살기로 하지 않았던가.

물속에 담그면 물이 푸르게 물든다는 물푸레나무처럼, 

잠시 잠깐 찾아온 나무의 푸른 빛을 머금다가 이내 자신의 색을 찾아가는 

나무 곁의 강물처럼 낭창낭창한 유연성이 필요한 나날이다.

 

화이부동(和而不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필요한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