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ose for Emily

다음의 축복

Tigerlily 2022. 8. 23. 14:08

 

#1. 이 to the 승 to the 우

 

한가함의 이유가 쓸쓸함에 있다니,

요즘의 내가 그러하다.

내가 떠나오거나 나를 떠나가거나의

세월이 만든 이합집산의 결과이니 어찌할 수 없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적막해진다는 것일 게다.

커피 한 잔 들고 가볍게 입을 털 사람이 없다 보니 

의도치 않게 과묵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으나

문제는 종일 표정이 같다는 것이다.

마스크 속의 화석화된 무표정.

 

이 고요함 속에서 만난 작가 이승우 님은

이 가을, 붉은 단풍잎 같은 작은 설레임이다.

겨우 장편 두 권과 단편 서너 개를 읽고서 정신 못 차리게 빠져들었다.

한 편도 빠짐없이 샅샅이 읽고 있는 유일한 작가라는

한 평론가의 말이 아니어도 이미 입덕 할 준비가 되어버렸다.

 

어젯밤 그의 단편소설 <마음의 부력>을 단숨에 읽고서 출근한 오늘 아침,

그 소설의 붓질과 감성으로 터질 듯 빵빵하게 부푼 

내 심장을 풀어헤쳐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마스크 속 내 적막의 내압만 몇 도 상승했다.

 

주문한 이승우 님의 그다음 책을 기다리는 설렘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2. 얄짤없다

 

초보라는 딱지는 일종의 프리미엄이다.

초보운전 표시가 되어있는 운전자의 서툼은 힐난보다는 관용을 부른다. 

초보 교사 시절, 업무처리나 학생 지도에 미숙하여 속상해할 때 선배 교사의 한 마디는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었다.

'낙심하지 마. 처음 5년 동안은 학교에 손해만 끼칠 수밖에 없어.

그 세월을 넘어야 서서히 학교에 유익을 주는 교사가 되는 거야.'

 

그림을 배운 지 벌써 몇 년의 세월이 되었다. 

초기에는 그림이 완성되면 프사에도 올리며 겁 없이, 철없이 자랑을 하곤 했지만

서서히 그 빈도가 줄고 있다. 초보 프리미엄의 기간이 끝났음을 자각한 까닭이다.

쌓인 세월에 비례한 수준의 그림이 나오지 않는 나의 능력 없음에 대한 자의식 탓이다.

블로그에 글을 써서 올리는 것 역시 비슷하다.

그 정도 시간이 지났으면 그 정도는 돼야지, 라는 생각이 나를 소심하게 한다.

 

세월은 여러 가지로 참 험악한 놈이다.

얄짤없다.

 

#3. 다음의 축복

 

-해명할 방법이 전혀 없는 곳, 누구나 일단 분류되고 나면, 그것으로 끝나버리는 그런 곳.

그의 소설 《전락》에서 까뮈가 내린 지옥에 대한 정의이다.

 

슬픔이나 회한은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지만

미안함이나 죄의식은 더 진해진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해명할 기회가 없는 곳도 지옥이겠지만

만회할 기회, 즉 '다음'이 없는 곳 역시 지옥일 것이다.

 

TGIF(Thanks God! It's Friday.)가

언제부턴가 OGIF(Oh, my God! It's Friday.)가 되었다.

치매에 걸린 엄마를 모시고 사는 올케언니의 수고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언제부턴가 주말마다 엄마를 우리 집으로 모셔오고 있다.

문제는 오시자마자, '집에 가야지'가 시작된다는 것.

막내딸이고, 뭣이고 이제 안중에 없고 

자신의 방이 있는 '집'에 대한 집착이 강해져 

드시고 주무시는 시간만 빼면 '집에 가야지' 타령만 이어진다.

달래고 달래다가 티격태격으로 이어질 때가 있다.

싸움의 상대가 전혀 되지 않는 91세의 치매노인과의 싸움이라니,

슬프고 쓸쓸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 주말의 끝에 엄마를 모셔다 드리고 돌아오는 길은

해방감이 아니라 죄책감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유일한 위안은 

다음의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또 다음 주가 있다는 것이다.

아직은 살아계셔줌으로써 이 못난 딸에게 만회할 기회를 주신다는 것이다.

 

다음이 주는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