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와 3/4 플랫폼
제주도의 마지막 밤을 앞둔, 오늘은
종일 피곤에 지쳐 시들시들했다.
어젯밤 AIG LPGA 결승라운드를 보느라 날밤을 새웠기 때문이다.
-10으로 동점이 된 전인지와 마들렌 부하이가 연속된 연장전에도 승부가 갈리지 않아
무려 4차전까지 이어졌다.
시종 무표정하던 부하이는 우승 퍼트에 성공하자 모자의 챙을 푹 누르고 눈물을 감추었다.
남편은 그린으로 뛰어들어 아내를 끌어안고 볼을 비비고 키스를 하며
어쩔 줄 몰라하며 기쁨을 나누었다.
야구선수가 홈런을 친다든가, 축구선수가 골을 넣는다든가,
골프선수가 우승 퍼트로 홀컵 안으로 공을 떨어뜨렸다든가, 등의
스포츠인들의 극치의 기쁨의 순간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의 터질듯한 환희가 부럽다.
일반의 사람들이라면 10점 만점의 10점의 수치에 해당하는 기쁨의 순간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그런 생활의 그럭 저럭의 날들.
축구선수들은 각각 나름의 골 세리머니가 있다.
이미 은퇴한 독일의 클로제는 제비를 넘었었고
언젠가 베베토는 출산한 아내를 위해 아기를 어르는 세리머니를 했었다.
안정환이의 반지키스 세리머니와 손흥민의 카메라 세리머니는 하도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가끔 나도 나의 골 세리머니를 만들어보고 싶다.
골을 넣을 일도, 골 세리머니를 선 보이며 기쁨을 폭발시킬 일도 없을 테지만
누구도 생각지 못한 독창적이고도 멋진 몸짓으로 나의 기쁨의 순간을 표현하고 싶다.
만들어 놓으면 언젠가는 써먹을 것 아닌가.
아니, 만들어 놓으면 써먹어보고 싶어질 것 아닌가. 써먹을 일이 생기지 않을까.
제주도 보름 살기의 마지막 밤이다.
풀어놨던 짐을 다시 쌌다.
돌아갈 전주나, 보름 머문 제주나 크게 다를 것 없겠지만
여행의 끝에는 현실이 똬리를 틀고 있다.
잠시 밀쳐두었던 낱낱의 걱정거리와 구체적인 해결을 기다리는 문제들과 다시 대면해야 한다.
하지만
제주의 많은 숲 속을 거닐며
노매드처럼 살자는 얘기를 많이 나눴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초원을 찾아 옮겨 다니며 사는 유목민처럼, 방랑자처럼
벌거벗은 삶으로 살아가자는.
그 힘이 어쩌면
내 고유의 골 세리머니가 될지도 모르겠다.
구태여 제주도가 아니어도, 발리가 아니어도
압도되지 않고, 버르장머리 없는 현실의 기선을 잡을 나의 즐거운 춤.
해피포터 속 킹 크로스 역의 9와 3/4 플랫폼처럼 말이다.
유연하게 환타지를 섞으며 살 줄 아는 그런 비상구의 입구를 어렴풋이 살펴놨다.
어쨌든, 살 쉬었다간다.
See you again, Jej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