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ose for Emily

이팝과 조팝 사이

Tigerlily 2022. 5. 16. 22:11

 

 

이팝꽃이 한창이다.

소복하게 피어있는 모습뿐만 아니라 낱낱의 한 알 한 알이 통통한 쌀알 같다해서

시골 할머니들은 쌀밥 나무라고도 한단다.

멀리서 보면 아카시아, 생강나무, 이팝나무의 꽃이 모두 흡사해 보이지만

알고 나면, 하얀색이라는 공통점 외엔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몇 년 전부터 전주 시내 곳곳에 가로수로 심어진 이팝나무가 이제 그 풍성함을 피워내고 있어서

가로수로 이팝나무를 고른 공무원의 안목과 조경업자의 로비가 낭만스럽다.

이름과 생김새가 잘 어우러진 나무랄 데 없는 나무, 이팝나무이다.

 

 

내가 이팝과 헷갈린 것은 생강나무도 아카시아도 아닌 바로 조팝나무다.

단지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인한 몇 번의 혼동을 거치고 나서야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벚꽃과 피는 시기가 비슷한 조팝나무는 이팝에 비해 개화시기가 한 달 정도 이르다.

키가 작은 관목류여서 가로수보다는 키 낮은 울타리로 더 적절하다.

작고도 하얀 꽃잎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앙증맞은지 무릎 구부려 한참을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너는 어쩜 그렇게도 이쁘냐.'

가까이서 보아도, 멀리서 보아도 매혹당하지 않을 수 없는 꽃이다.

하지만 처음 조팝나무의 이름을 알게 되었을 때

꽃의 아름다움과 어울리지 않는 망측스러운 이름에 적잖이 실망했다.

조팝이 뭐람. 발음 조심했야겠네.

 

하지만 그것의 매력에 홀린 이후부터는 더 이상 그 이름이 마음속에서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이름이 대수야, 꽃이 그렇게나 사랑스러운데!

단점처럼 보였던 그 독특한 이름이 오히려 매력의 요소가 되었다.

단단히 홀린 것이다. 조팝이 조팝을 넘어섰다.

본질이 외피를 압도할 때 외피는 더 이상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할 일 줘요? 술 말고 할 일 줘요? 날 추앙해요.

난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개새끼, 개새끼... 내가 만났던 놈들은 다 개새끼.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가득 채워지게.

조금 있으면 겨울이에요. 겨울이 오면 살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게 앉아서 보고 있을 것도 없어요.

공장에 일도 없고, 낮부터 마시면서 쓰레기 같은 기분 견디는 거, 지옥 같을 거예요.

당신은 어떤 일이든 해야 돼요.

난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요.”

 

 

요즘 주말을 기다리게 하는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의 한 대사이다.

알게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사랑의 기미도 안 보이는 한 남자, 손석구에게

마음이 향하게 된 한 여자, 김지원이 하는 말이다.

고백이지만 명령에 가까운 요구이다.

남녀 관계에서 생경하기 그지없는 감정의 어휘, '추앙'은 그 말을 듣는 손석구에게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놀라운 것이어서 그처럼 나도 사전을 찾아보았다.

이제껏 만났던 개새끼들로 인해 그깟 사랑 따위로는 채워질 수 없는 그녀의 마음에 

추앙이란 그 무엇도 걸림돌이나 핑계가 되지 못할 압도적인 본질을 가지는 사랑을 의미할 것이다.

 

 

 

 

로맨스가 해방으로 가는 탈출구가 되려면 누군가를 완벽히 받아들이는 맹목에 가까운 몰입이 필요하다.

계산 속 빠른 호모 사피엔스가 그게 쉽던가. 그러다 보니 개새끼가 시글시글할 수밖에 없지.

로맨스가 해방에 이르는 동력이 되지 못하기에

연애다운 연애도, 연애 아닌 해방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조팝이 조팝 이상이 되는 것은 쉽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