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그린 초상화
우리가 한 사람을 '본다'라고 할 때 그 행위는 사진을 찍는 행위보다 초상화 그리기에 가깝다.
특히 당장 내 앞에 있는 그 사람을 볼 때가 아니라 기억을 떠올릴 때 더욱 그렇다.
가족이든, 연인이든, 아무리 친숙한 얼굴이라도 구체적인 '사실'들이 머릿속에 스냅사진처럼 상기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얼굴을 생생하게 떠올리는데, 어딘가 불분명한 선들로 이뤄진 한 사람의 형상이
오랜 시간 그 사람과 만나며 끌어 모은 세부 사항들로 합성된 이미지처럼 나타난다.
이미지는 선이 두드러지 않는 램브란트의 그림처럼 회화적으로 구현된다.
...
우리가 누군가를 바라볼 때는 그 사람과 함께한 모든 순간에서 그가 보여준 미세한 떨림과
다양한 표정, 긴장했을 때 움츠러들던 어깨, 해 질 녘 그림자가 진 옆얼굴, 지쳤을 때의 목소리,
들떴을 때면 쭉 퍼지던 목선,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을 힘껏 들어 올릴 때의 팔뚝 등이 하나로 밀도 있게 통합되어
그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그 이미지는 지금 바로 이 시점에 내 눈에 들어오는 그 사람의 이미지에 덧씌워진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콩깍지'는 어쩌면 알 수 없는 비합리적인 힘에 도취된 상태가 아니라
오랜 시간 섬세하게 분별한 그 사람의 미적 요소들이 완전하게 통합된,
그 사람의 초상화가 주는 아름다움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훌륭한 화가일수록 스냅사진의 매력을 넘어서는 아름다움을 포착할 것이다.
오랜 시간 섬세하게 분별한 그 사람의 미적 요소들이 완전하게 통합된,
그 사람의 초상화가 주는 아름다움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물론 초상화의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가 가장 중요할 것이다.
-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계절, 274, 276-
제라늄 화분을 사왔다.
화원의 주인 아주머니는 아직 피지 않은 꽃망울을 보며 아마도 분홍색 꽃일 것일 가능성이 높다며
안심을 시키는 눈치였지만 나는 내심 진한 붉은색을 기대하고 있다.
일반적인 꽃이 가지는 고운 향기와는 달리 제라늄은 잎사귀에 손 끝만 스쳐도 지독하게 역한 냄새가 묻어난다.
그럼에도 숱한 향기로운 꽃들 놔두고 진즉부터 붉은색 제라늄을 들여놓고 싶었던 이유가 있다.
'창틀에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 비둘기들이 앉아 있는 붉은 벽돌집'이라는 구절이 나오는
《어린 왕자》덕분이다.
그 못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는 제라늄에 대한 다정한 기억 때문이다.
나의 어린 시절, 논으로 밭으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토종개처럼 바빴던 우리 엄마는
그 분주한 틈을 벌리어 화단에 갖가지 꽃을 심으셨고 토방 위에는 화분들을 나래비 나래비 세워놓으셨다.
그 시절 토방 위에서 피고 지고를 반복했던 꽃들 중의 하나가 바로 붉은 제라늄이다.
어디 그 뿐이랴
나의 남편의 소울 푸드는 쫑쫑 썬 신 김치와 콩나물에 밥을 넣고 폭폭 끓인 콩나물국밥이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겨울을 나던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제라늄이 되었든, 콩나물국밥이 되었든
그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들에 개개인의 서사가 깃들어 있을 때 그것들은 더 이상
단순한 꽃이나 음식으로 머물지 않는다.
독특한 의미가 첨가되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가치가 된다.
사물이 이러한데 사람에 대해서야 어떠하겠는가.
김원영 님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바라보는 행위는
사진을 찍는 행위라기보다는 초상화를 그리는 일에 더 가깝다고 했다.
지금 내 눈에 들어오는 시각적 모습으로서의 그가 아니라
오랜 시간 보아온 시간의 축적으로서의 그 사람을 이름이다.
자세히 보아야, 오래 보아야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표현한 한 시인의 말과도 통한다.
타인에 대해 공들여 들여다보는 시간을 생략할수록 초점이 맞춰지지 않은 사진을 얻을 수밖에 없다.
한 개인이 누군가에게 고유한 개인이 되는 것은 그가 고유하게 경험한 시간,
즉 긴 시간을 들여 그 상대방의 초상화를 그려본 나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 사람이 오는 것은 그의 우주가 오는 것이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당신의 우주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정현종, <방문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