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착하되 고착되지 않는'
강력 접착제 개발 도중 실수로 탄생한 post it의 특성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다.
한 달여의 이번 겨울방학을 보내면서 자주 떠올렸던 말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당최 햇빛이 들지 않는 한 달이었다.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만만하게 상대할 수 없게 된 영혼의 물렁화!
사람이 되었든, 상황이 되었든,
상대하여 굴복시키기는커녕 맞닥뜨려 극복하는 일조차 지레 겁이 나는 일이 되어버렸다.
불독 앞의 똥개처럼 일찌감치 눈은 내리깔고 꼬리는 이빠이 꼬아서 사타구니 사이로 처박으며,
맞짱은 고사하고 알아서 항복하는 형상이 되었다.
비록 아직은 내 안에서 비밀스레 일어나는 나만 아는 항복이지만
닦고 조이고 기름치는 영혼의 재정비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동네방네 다 소문나게 될 '금쪽같은 내 새끼' 급의 멘털 붕괴 상태가 불 보듯 뻔해 보인다.
영혼의 수선작업으로 가장 먼저 꺼내든 건 나의 희망 수명의 조절이었다.
언젠가, 나름 여러 상황을 참고하여 설정해 놓은 나의 희망 수명 87세를, 이번에 78세로 줄였다.
그때까지만 살아야지. 그걸로 충분해.
희망이 독하고도 비루한 욕망으로 변질되어 잔잔한 고요를 온새미로 누리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삶의 덧없음, 생의 유한성을 깜빡깜빡 잊어버린다는 데 있지 않던가.
잠깐 정차했다가 금세 떠날 붉은 칸나가 핀 간이역 같은 게 우리 인생인데 너무 깊이 마음 두지 말아야지.
기대수명을 줄이자 유레카! 아르키메데스의 목욕통의 물처럼 갖가지 욕망들이 줄여진 연수만큼 욕조 밖으로 덜어내 졌다.
"자신의 열등한 육체를 저주하다가도 누군가로부터 주먹이 날아오면 몸을 지키기 위해 정신을 차리듯이.
그러니까 징징대는 그의 생을 한 대 툭 쳐주라는 것.
넌 네 생이 싫어? 그럼 내가 망가뜨려줄까?"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맞다.
생각보다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라는 생각은
생의 덧없음을 상기함으로써 욕망의 끈을 느슨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온 게 분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징징대는 내 생에 대해 누군가에 의해 강 펀치로 한 대 툭 쳐줌을 당함으로써
정신을 차리게 되는 예상치 못한 효과도 얻었다.
엄살떨지 말라는 것이다.
앞으로 겨우 20년도 남아있지 않은 나의 여생, 농축된 생기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내가 망가뜨려줄까?'
데미안을 괴롭히던 프란츠 크로머의 발소리처럼 그 말은 무방비 상태로 내려진 나의 두 팔을 들어 올리게 하는 방어력을 회복시켜주기도 했다.
겸손하게 줄인 78세는커녕 하루 앞도 모르는 게 우리네 인생이고
어렸을 때 우리 할머니, 해결할 수 없는 절망 속에 막막하고 답답할 때
'썩을 눔의 세상, 그만 내가 죽어야지.' 홀로이 뱉어내던 넋두리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혼곤한 낮잠 속 호접몽처럼, 꿈꾼 후의 나는 꿈꾸기 전의 나와는 한참이나 다를 것이다.
그래, 87이 되었든, 78이 되었든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삶,
'지나가는 자(passerby)'의 삶으로 살아야지.
포스트잇처럼, 접착하되 고착되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