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ose for Emily

소멸하는 것은 아름답다

Tigerlily 2021. 11. 3. 16:32

 

봄날의 벚꽃도 그렇지만 가을의 단풍도 순간이다.

고년 참 예쁘네, 내 마음이 어깨를 기달라치면 벌써 몸을 뺀다.  떨어지기 시작한다.

여간해서는 곁은 내주지 않는 까탈스러운 서울 첩년 같다.

그런 유한성이 어쩌면 아름다움의 매력을 배가시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시사철 핀 벚꽃을 상상해보라, 조화(造花)와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시들어야 꽃이고 떨어져야 단풍이다.

 

슈베르트의 교향곡 8번은 '미완성 교향곡'이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슈베르트가 죽기 6년 전 작곡했으나 2악장까지 쓴 뒤 마무리를 짓지 못한 데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9개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곡으로 손꼽힌다.

브람스는 이 교향곡에 대해

'이 곡은 양식적으로는 분명히 미완성이지만 내용적으로는 결코 미완성이 아니다.

이 두 악장은 내용이 충실하며 그 아름다운 선율은 사람의 영혼을 끝없는 사랑으로 휘어잡기 때문에

누구라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당대의 다른 음악가들의 작품과 동일하게 전통적인 4악장으로 '완성 교향곡'이 되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상상하고 싶지 않다. 미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며 완성이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국어 책에 <탈고 안될 전설>이라는 소설 같은 수필이 실려 있었다.

국어 선생님의 뜻에 따라 '소설 이어 쓰기'라는 활동을 했었다.

억지스러운 덧붙이기에 불과한 그 활동으로 인해

상상력으로 채울 빈칸이 온갖 쓰레기로 채워지는 씁쓸함의 기억과

미완의 여운이 주는 아름다움이 산산조각이 났던 허망함만 선명히 남아있다.

안 그려도 되는 뱀의 다리(巳足)를 그렸던 것이다.

 

《부정성 편향》이라는 책에는 '음반가게 효과'라는 표현이 나온다.

우리의 기억이란

요즘 노래는 폭넓고 다양하게 갖추어 놓은 반면,  과거의 것은 최고의 히트송만 간추려 놓은 음반가게와도 같다는 의미이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더 좋았던 때로 기억하는 게 사람들의 심리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추억이 필요하며, 향수(nostalgia)를 더 자주 느끼는 커플의 관계가 훨씬 좋다고 한다.

하지만 중요한 단서가 있다고 한다.

과거를 소중히 여기되 현재와 비교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그때가 좋았지.'는 현재의 행복에 독소만 될 뿐이라고.

 

요즘 티브이 예능프로 중에 얼마 전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이 있다.

산촌의 집에서 같이 밥도 해 먹고 사소한 일상을 같이 하는 모습을 통해 드라마 밖의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워낙 인기 있는 드라마였던 까닭에 종영을 섭섭해하는 시청자들의 아쉬움을 달래주는 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서 예능에서까지 그 덕을 보려는 방송국 측의 속셈 또한 뻔하다.

하지만 나는 '안 보련다.'이다

드라마 속의 배역들에 몰입하여 누렸던 감동을 여전히 간직하고 싶은 까닭이다.

용의 이마에 점을 찍는 화룡점정이란 열정을 하나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잠잠히 절제를 더하는 것이다.

아쉬움으로 남을 때 감동의 여운은 길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아쉬워 돌아보고 싶은 관계가 어찌 없겠는가.

가수 이적은 그대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고 다독인다.

열 받은 조용필은

나의 용서는 너를 잊는 것이라고 Q에게 말한다.

이별에 대한 가장 섹시한 복수는 '잊어 주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사랑이 끝난 것은 다른 이유가 없다.

그 관계의 생명이 다한 까닭이다.

 

소란하게 끝을 맺는 관계도 있지만

어영부영 소멸되는 관계도 많다.

그게 그 관계의 끝인 것이다.

 

소멸하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느닷없이 뚝뚝 지는 벚꽃처럼, 단풍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