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ose for Emily

우연인 것 같지만

Tigerlily 2021. 10. 16. 12:31

 

#1

아름다운 아가씨를 짝사랑하던 한 청년이 있었다.

수줍음에 직접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는 못하고 편지에 마음을 담아 보내기만 하는 세월을 지냈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난 후 그 아가씨의 결혼 소식을 들은 청년이 확인한 아가씨의 결혼 상대자는 우체부였다.

청년이 사랑했던 그 아가씨는 청년의 편지를 전달받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대면했던 우체부와 정이 들어버린 것이다.

 

비슷한 경험이 내게도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일종의 위문편지로 시작된 한 군인아저씨와의 편지왕래가 2년 정도 지속된 기억이 있다.

담임이셨던 최귀남 선생님의 강요에 가까운 부탁에 의해 선생님의 오빠가 속한 군대의 부대원들과 우리 반 전체 학생이 참여했던 행사로 시작된 편지왕래였다. 

급우들 대부분은 두 세번 편지가 왔다 갔다 하다가 그쳤지만 나만은 예외였다.

나름 글씨체도 괜찮았고 교내 백일장 정도는 상을 휩쓸던 가락의 글솜씨도 한몫을 하지 않았나 싶다. 

중딩이 무슨 대화의 대상이 될까마는 사제 인간이 고픈 군인 아저씨에게는 그나마 위로가 되었던 모양이고

막연한 그리움과 말랑말랑 터질것 같은 불온한 설렘으로 대상도 없이 봉긋봉긋 막막 부풀어 오르던 사춘기 촌년, 내게는 눈감고 꽃을 던지듯 가장 적절한 대상이었던 것 같다.

돌아보면 분별없던 시기의 감정과잉 아니었나, 라는 생각도 없지않지만 그래도 감사할 따름이다.

몸과 마음이 거칠게 성장하던 시기, 정돈되지 않은 모놀로그에 가까운 나의 생각과 표현을 대나무 숲처럼 오롯이 받아주어 그 시기를 거뜬히 넘어가게 해 준 그 아저씨의 징검다리와도 같은 역할에 깊이 감사한 마음이다.

 

얼굴도 모른 채 그렇게 2년여의 시간동안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은 199X부대, 안재학이라는 이름, 사려깊은 조언, 그리고 정갈하면서도 달필이었던 글씨체뿐이다.

오히려 한 주에 한 번꼴로 편지를 전달해준 우체부 아저씨의 얼굴과 아저씨가 올 시간에 서성이던 우리 집 대문가의 그림자만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관계의 우연이라니...

 

 

#2

'속수무책'은 내가 지도교사로 있는 학생 독서동아리있다.

내가 올해 야심하게 기획하여 교육청으로부터 지원금까지 얻어낸 프로젝트이다.

1학년 11명으로 구성된 이 동아리의 학생들은 열정과 수준, 그리고 동아리에 거는 기대가 상당하여

모임의 빈도에 비해 내가 쏟는 에너지와 신경이 여간이 아닌 게 사실이다. 

때론 사서하는 고생치 곤 좀 힘겹다,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책 읽는 아이들, 독서로 성장하는 아이들에 대한 오랜 소망을 실현할 수 있는 일이어서 행복하기도 하다.

 

이번 달 독서토론반 '속수무책'에서 선정한 도서는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이다.

《앵무새 죽이기》는 오래 전에 읽은 책이어서 아이들의 토론 진행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다시 읽게 되었다.

다시 읽어도 참 재미있었다. 토론하기에 참 적절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아이들이 이 책을 통해 인권감수성이 좀 더 높아지고 확고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읽고 나서 책의 뒤 커버의 안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스승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항상 건강하세요, 기전여중 1학년 2반 서미정'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 것 아닌가.

내가 처음 이 책을 손에 들게 된 것이 바로 아주 오래 전(기전여중시절이니 적어도 20여 년 전) 한 제자가 스승의 날 선물로 준 덕택이었던 것이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서미정,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지금 내가 지도하고 있는 동아리 회원들의 엄마 나이쯤 되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엄마뻘의 제자는 담임인 내게 선물을 했고 나는 그 엄마의 자녀뻘의 학생들에게 꼭 읽히고 싶은 책이 되었다니.

 

이 아름다운 마음의 순환이라니...

우연인 것 같지만.

 

 

#3 

치매인 우리 엄마는 소위 '이쁜 치매환자'이시다.

비슷한 환자에게 나타나는 억지나 폭력, 이상행동이 별로 없다.

단지 인지기능이 떨어져 의사소통이 어려울 뿐이다. 걸음마만 잘하는 네 살 짜리 순한 아기 같다.

굳이 엄마에게 두드러지는 이상행동을 꼽자면 두세 가지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는 화장지에 대한 집착이다.

화장지만 보면 욕심을 내어 돌돌 말아 호주머니마다 가득 집어넣는다.

어딜 가나 화장지를 두툼하게 몰아 가져오신다.

입을 닦으라고 드려도 그걸 네모 반듯하게 접고 계신다.

화장지에 대한 집착의 이유를 알 수는 없다.

어려웠던 시절 귀했던 화장지에 대한 집착이 병적으로 드러나는 걸까.

알 수 없다.

 

단지,

내가 엄마의 생일선물이라는 것을 처음 챙기던 날이 기억난다.

국민학교 때쯤이었던 것 같다.

그즈음 처음 나오던 여행용 '크리넥스 티슈'를 엄마의 생일 선물로 드렸던 기억이 있다.

 

'아이고 우리 막내가 선물을 다 주네. 다 컸네.'

100원 남짓의 그 작은 화장지를 선물이랍시고 주는 막내 딸내미가 염치없지 않도록 

눈썹을 치켜뜨는 과장된 고마움의 표정을 보여주시던 그날의 표정이 생각날 뿐이다.

엄마와 화장지, 막내가 준 첫 생일선물...

 

우연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