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ose for Emily

좋은 사람

Tigerlily 2021. 10. 5. 23:03

 

나는 '좋은 사람'이 좋다.

당연하고도 뻔한 얘기지만 선한 사람이 참 좋다.

울퉁불퉁한 세상살이에서 사람 좋은 이를 보면 그나마 안심이 된다. 오래도록 곁에 두고 싶어진다.

'좋은'이라는 형용사 자체가 명제가 될 수 없는 주관적인 판단의 어휘인 까닭에

도대체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냐, 라는 힐문이 이어질 수밖에 없으리라.

 

 

내 생애,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있었던 한 때를 여전히 또렷히 기억한다.

첫 아이 홍균이를 출산하고 품에 처음 안았을 때 가슴 밑바닥에서 뜨겁게 밀려든 감정은

오직 하나 '좋은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내 몸을 통해 가장 소중한 존재를 세상 밖에 내놓으며 그 아이의 행복을 지켜줄 가장 확실한 안전장치가

다름아닌 바로 내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소중한 것을 지켜내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억척스러운 야무짐이 아니라

지극히 선하게 살아가는 삶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선함이란 난데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방문이 꽝 닫히지 않도록 괴어놓는 베개와도 같은 것이다.

어느 시인의 노모가 그랬듯

마당에 뜨거운 물을 내 버릴 때, 흙 속의 미물의 생명체에게 속삭이는 '눈 감아라, 눈 감아라.'와도 같은 주술과도 같은 것이다.

 

 

목요일 밤을 즐거움으로 기다리게 했던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 2》가 끝났다.

드라마 속 추민하가 짝사랑하던 양석형 교수에게 직진 고백하는 장면이 있었다.

한 번의 이혼의 경험이 있어 망설일 수밖에 없는 그가 그녀의 거듭된 마음 표현에

 '내가 나쁜 사람이면 어쩌려고 그러니'라는 말을 하자 그녀는 명확하게 말한다.

 

"교수님, 그런데, 저는 좋.은. 사.람.이에요."

 

내가 이제껏 들어 본 가장 아름다운 고백이었다.

그녀가 그에게 하는 고백을 들으며 TV 밖의 내가 눈물이 나왔다.

진심이란 바로 저런 것이지.

쉽고도 미세한 거야.

 

 

당신을 이만큼 사랑한다느니,

이래서 나는 당신이 필요하다느니,

당신을 위해 내가 이렇게 하겠다느니, 따위의 맹세나 약속 대신

 

흔하고도 흔한 형용사를 사용하여 표현한

'당신을 사랑하는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뜻밖의 고백이 이렇게 공감의 설렘을 줄 줄이야. 

 

 

하루하루가 풍년인데

일 년 내내 허기가 가시지 않는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기근 같은 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심보선, (식후에 이별하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내야 할 현실, 혹은 결혼생활은 시(詩)가 아니라 지루한 대하소설이다.

 

 

그러기에

내 곁에 있는 그가 나를 얼마큼 사랑하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이다.

 

 

나는 '좋은 사람'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