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아요
독서모임 <봄>에서 8월 특집으로
셰익스피어 톺아보기를 하고 있다.
일 년 열두 달 중에서 한 두 달은 '고전 다시 읽기'를 시도하고 있다.
모두 다 읽은 것 같지만 거의 다 안 읽은 게 고전이라는 재미난 정의답게
읽은 듯, 안 읽은 듯 주워들은 풍월은 많지만 정작
'그래서 읽었냐고요...?'라는 물음에는 어물쩍하는 넘어가고 싶은 책들이 많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런던올림픽 개막식 퍼레이드에서 온통 이곳저곳에 덕지덕지 붙여놨던
셰익스피어 작품 속의 유명 문구들을 보며
그들의 문화적 긍지에 대한 부러움과 질시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
카알라일은 인도와 셰익스피어를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선 《햄릿》과 《오델로》를 먼저 읽었다.
영문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한 학기의 수강과목 자체가 《햄릿》이었으니
영어 원서로 읽었을 뿐만 아니라 중요대사들은 외워서 B4용지에 빽빽하게 써 내려가는 시험까지 치러 낸,
나름 《햄릿》에 빠삭한 일 인이다.
그 이후에도 대학원 공부, 학교에서 실시한 <독서 골든벨> 등을 거치며 몇 번을 더 읽은 경험이 있다.
하지만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다시 만난
덴마크의 고뇌에 찬 왕자님과 베네치아의 무어인 오셀로 님은 내게 다시 새로웠다.
'맞아, 이런 구절이 있었지.
햄릿을 우유부단의 전형으로 몰아세우면 안 된다는 게 맞아.
레어티스에게 하는 폴로니어스 영감의 긴 당부는 그야말로 꼰대 짓이네.
극 중 극 이름이 '쥐덫'이었지.
이아고, 이 더러운 놈.'
읽을 때마다 새롭다.
하지만
읽을 때마다 새롭다, 는 말은 사실은
작품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자조의 한탄이다.
얼마 전 다시 읽은 《데미안》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읽을 때뿐이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성긴 체에 모래를 넣고 흔들듯 재차 읽어서 다시 확인된 내용들은 또, 또 고스란히 싸악
체 밑으로 빠져나가버린다.
그리고 옛날부터 그 옛날부터 알았던 기초적인 뼈대만, 체 위의 돌멩이들처럼 또 남게 된다.
죽어도 안 잊어먹는 구구단처럼, 주기도문처럼.
사실,
내 머릿속에 각인된 《햄릿》의 대부분은
대학교 때 우리 과에서 공연했던 연극의 실루엣이다.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강한 잔상으로 남아있어
그 이후의 여러 번의 정독도 그 연극이 남긴 이미지를 이기지 못한다.
어느 부분의 디테일이 떠오르지 않으면 그 연극의 기억의 도움을 받는다.
때로 한심하기도 하지만 청각이 곁들여진 시각의, 횡포에 가까운 파워에 백기를 들뿐이다.
"파리의 레스토랑 '당 르 누아르'에는 조명이 전혀 없습니다.
웨이터는 대부분 시각 장애인입니다. 런던 지점은 영화 <어바웃 타임>에도 나오지요.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에 집중하여 식사를 하는 곳입니다.
북촌에는 '어둠 속의 대화'라는 공간이 있어 이와 비슷한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시각은 우리의 감각을 지배합니다.
시각을 차단하면 다른 감각이 훨씬 민감해지죠.
식사를 하거나 꽃향기를 맡을 때, 그저 햇볕을 쬐거나 바람을 맞을 때도
눈을 감아 보세요.
놀라운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 김하나, 《15 º》, 청림출판, 182~183 -
시각 덕택에
많은 쾌락을 누리지만
시각 탓에
더 큰 기쁨을 맛보지 못하기도 한다.
오늘은 이렇게 비틀어보고 싶다.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이니라,(《햄릿》, 1막 2장 '햄릿'의 대사)
가 아니라
독한 감각이여, 그대의 이름은 시각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