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ose for Emily

나쁜 놈의 자격

Tigerlily 2021. 2. 25. 20:49

 

 

 

"나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은, 나쁘면서 불쌍하기까지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김애란의 단편 <달려라 아비>에 나오는 구절이다.

맞는 말이다. 나쁜 놈은 총체적으로 완벽하게 나빠야 한다.

따귀를 한 대 올리면서 아플까 염려까지 해서 손 힘을 빼야 하는 긍휼의 건덕지가 있어서는 안 되지 않은가.

맘 놓고 미워할 수 있을 대상이 되어야 바야흐로 나쁜 놈의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나쁜 놈은 나쁜 놈 다워야한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에서

주인공 루드빅은 가볍게 던진 농담 한 마디로 인해 탄광에서 15년이 넘는 징벌의 시간을 보낸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에게 지옥의 시간을 보내도록 만든 장본인인 제마네크에게 복수를 계획한다.

그의 아내 헬레나를 유혹하여 통쾌한 복수의 칼을 꽂았다고 기뻐하는 순간, 이내 허탈의 늪에 빠진다.

제마네크에게는 이미 다른 연인이 있었던 것이다.

허망한 헛발질이었다.

복수가 복수되지 못한 것이다. 

 

 

 

 

유약한 유년기를 보낸 나의 남편은 아직도 털어내지 못한 그 시절의 보풀을 가끔씩 호호 불어

그 시절의 쌉싸름한 에피소드를 내게 동화처럼 들려주곤 한다.

살아내느라 바빴던 그의 부모는 동네 못된 골목대장들의 장난 삼은 돌팔매의 바람막이가 되어주지 못했고

제대로 된 공책 하나 가방 속에 넣고 다니지 못했던 교실 안에서는 그 시절 흔했던 괴물 같은 선생들의 화풀이의 만만한 대상이었다고 한다.

 

그의 얘기를 듣다 보면

차가운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그 시절의 작은 소년에게 다가가

껍데기를 직접 깐 대일밴드를 손가락에 붙여주고 싶기도 하고

손을 내밀어 햇살 아래로 데리고 나오고 싶기도 한다.

싸움 잘하는 앙칼진 누이가 되어 빼앗긴 운동화를 되찾아 신겨주고 싶기도 하고

그 새끼를 찾아가서 뒤통수를 눈알이 튀어나오게 한 대 올려붙이고 싶기도 한다.  

 

"내가 꼭 찾아보고 싶은 사람이 한 명 있어.

중학교 3학년 때 옆반 선생님이었는데,

이유 없이 맞았던 그날의 수치와 억울함을 떨쳐내는데 참 오래 걸렸거든.

만나서 꼭 물어보고 싶어. 그 때 왜 그러셨냐고...?"

 

갑자기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이병헌이 김영철에게 했던 대사

"말해봐요. 나한테 왜 그랬어요?" 가 생각나서 풉, 웃음을 흘리려는 순간 

그의 입에서 나온 그 선생의 이름이 낯설지가 않았다.

 

"뭔 일이래... 송호태라고? 확실한지는 모르지만 나 그 사람 알 것 같아.

옛날에 우리 신작로 옆 논 세마지기 산 사람이야. 거기에 새로 집 지어서 살고 있거든.

내 기억에 그때 그 양반, 선생이라고 했던 기억나네. 호리호리하고 안경 쓰신 분." 

 

원수가 코 앞에 살고 있었다.

 

그 후 몇 일이 지난 어느날, 동산촌 엄마집을 가는 길에 일부러 그 집 앞 도로를 택했다.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그 집 앞 근방에 이르러 남편은 차를 세웠다.

큰 도로에서 들어간 이면도로에 대문이 면해있는 그 집 대문의 문패를 확인한 후

우리는 마치 포획물이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배고픈 사냥꾼처럼 상기된 얼굴로 숨을 죽이며

그 집의 동태를 살폈다.

지쳐갈 무렵,

수숫대로 대충 묶은 허수아비같이 생긴 노인네 한 명이 늘어진 파자마를 걸치고

음식쓰레기 봉다리를 들고 문 앞으로 걸어나왔다.

 

"맞아?"

"그런 것 같네."

"얼른 가서 물어봐. 왜 그랬냐고."

 

남편은 갑자기 더 이상 하나도 궁금하지 않게 되었는지,

아무 말 없이 씁쓸하게 차에 시동을 걸었다.

 

"물어서 뭐 하겠어."

 

그의 적은 이미 불쌍한 사람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적수로서 앙갚음을 견뎌낼 힘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쓸쓸하고 허망한 부전승이라니.

혹시 남편의 부전패 아닌가?

 

나는 들릴락말락하는 소리로 김영철의 대사를 살짝 비틀어 읊조렸다.

'넌 내게 허탈함을 줬어.'

 

누가 이겼는지 계산이 안 되는 쓸쓸한 조우였다.

원수들이여, 제발 힘을 갖춰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