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ose for Emily

휘파람

Tigerlily 2021. 2. 15. 23:49

 

1. 빵꾸를 내려다가

 

남원 언니집에 가는 길에 잠시 씬의 일터를 들렀다.

전주에서 출발하기 전에 슈크림 맛이 끝내주는 카페 '비어드 파파'에서 빵을 한 박스 포장했다.

남원에 도착하여 사무실 근처 커피숍에서 카페라떼 두 잔도 테이크 아웃했다.

나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씬은 깜짝 반가워했고

한눈에 바로 그 놈일 것 같은 그놈을 향해 나는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영신이 친구예요."

가장 서글서글하고 보들거리는 표정을 만들어서 인사를 했다.

 

얼마 전 서넛이 모인 저녁식사 자리에서 씬은  

새로 발령난 남원 사무실의 직속상관에 대해 하소연 한 보따리를 풀어놨었다.

매사 반말에, 사사건건 트집과 지적질에 요즘도 그런 놈이 있나 싶었다.

너는 어찌그리도 유비쿼터스로 완벽하게 남자복이 없냐,

참지 말고 받아버려라, 아니면 능력껏 니 편으로 확 만들어봐라, 정 안되면 명퇴해버려.

본 적 없는 그 놈을 향해 욕과 흉을 바가지로 쏟아낸 게 엊그제였었다.

 

"이 빵 정말 맛있어요. 맛있게 드세요.

그리고 우리 영신이 많이 이뻐해 주세요."

언니가 기다린다는 핑계를 대며 서둘러 사무실을 나왔다.

 

앗, 이게 뭐야, 이게 아닌데...

그 싸가지의 차 빵꾸라도 내줘야 하는 게 맞는 것 아니던가... 

아, 참 멀다. 자존심도, 인권도.

 

그래도 그 양반, 빵값은 하겠지?

 

2. 이렇게 쉬울 수가

 

큰 아들 홍균이를 보내고 나면 매번 마음이 아리다. 휴유증이 이삼일은 간다.

만났다가 헤어지는 일을 수 없이 반복했으니 그만 무던해질 만도 한데 항상 똑같다.

현재의 풀리지 않는 상황에 대한 부모로서의 자책이 더해져서 더 그러하다.

서울로의 귀성이 하루 지났고, 이제 나도 담담해졌구나, 싶었는데

웬걸, 식탁 내 자리에 앉아 혼자 커피를 홀짝이다가 또 시작이 되었다.

조금씩 흐르던 눈물은 둑이 넘어지듯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눈물 콧물 범벅된 얼굴로 카톡을 보내봤다.

 

"홍균아, 뭐해?"

한 시간이 지나도록 읽지도 않았다.

"돈 아끼지 말고 맛있는 것 많이 사 먹어." 

30분쯤 후에야 한마디 답이 겨우 왔다.

"네."

 

눈물이 싹 멈췄다.

나만 심각한 게 얼마나 다행인가.

내 마음 달래는 일이 이렇게 쉬울 수가.

 

 

3. 정족쳐님

 

"다시 전화해, 엄마. 올 줄 알아? 내가 전화해 줄까? 절 대 안 올 걸. 족쳐야 일이 돼."

 

안방 화장실 변기 뒤편의 실리콘이 떨어져 관리실의 영선 부장님께 보수 부탁을 드린 지

이틀이 지났다. 감감무소식이다.

 

"아냐, 준비해서 오신다고 분명히 말했어. 기다려봐. 왜 그렇게 정신 사납게 사냐."

"아이고, 우리 엄마 어쩌까이. 5만 원 빵 내기할까? 재차 전화 없이도 오신다 VS 안 오신다."

 

이번 주 토요일로 데드라인을 정해놓고 오만 원씩 꺼내 벽에 붙여놨다.

 

족치지 않고도,

행여 세상이 속일까 경계하지 않고도,

가끔 속아 넘어가 주는 것에 열불 나지 않으며

룰루랄라 널널하게 살아가는 우리 정족쳐님이 되었으면 참 좋겠는데...